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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May 14. 2022

가끔은 글을 쓰는 제가 면목없습니다

취약함과 글의 힘을 믿는 키키에게

안녕하세요 키키님

테스트 겸 첫 편지를 보냅니다. 수신자가 명확한 편지는 오랜만이라 상당히 민망하고 떨리네요.

잘 지내셨나요? 카페에 앉아 비건 케이크를 먹으며 편지 콘텐츠를 써보자고 신나서 떠들었던 날이 벌써 2주 전이네요. 저는 그동안 그럭저럭 기쁘고 우울하고 바쁘고 평안한 나날들을 보내었답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고뇌하며 그때의 기록을 다시 보았는데요. ‘무엇을 키워드로 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 밑에는 다음과 같은 불친절한 메모가 악필로 쓰여있더군요.


영화, 책 문화 콘텐츠 - 사회와 연결

ㄴ돌봄과 다양한 취약성


문화 콘텐츠를 사회 문제와 연결해서 돌봄과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대충 해석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기를 바라요.)


돌봄과 취약성. 사실 저는 오랫동안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저의 브런치 초반 글들은 질병과 장애, 나이 듦, 죽음을 다루고 있죠. 교내 언론 동아리에서도 비슷한 글들을 썼습니다. 노인 혐오, 팬데믹 속 소수자의 시민권, 페미니즘 에세이 등등. 주제는 달라도 결론은 늘 같았어요. '우리는 모두 약하기에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것. 돌봄을 하도 이야기한 탓에 동아리에서 ‘돌봄 마니아’라는 희한한 별명도 얻기도 했죠. 얼핏 듣기에 좋은 칭호였지만 사실 저는 그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뭐랄까요. ‘속 좋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말을 듣는 기분이랄까요. 누구도 제게 그런 뉘앙스를 비춘 적 없었지만 혼자 마음이 쓰였어요. 저로서도, 이 무정한 세계에서 사랑이나 돌봄을 말하는 것이 철없고 겸연쩍게 여겨졌거든요.


다정한 키키님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위로해주실 테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약하기에 서로 돌봐야 한다는, 막연하고도 순진한 글을 쓰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제가 마주해야 했던 세계는 복잡하고도 비열했습니다. 뭔 소리래? 싶으실 테니 조금 더 설명을 해볼게요.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예요.

3월 28일 어제, 김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장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초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이기도 한 그는 같은 정당의 대표 이준석의 발언을 사과하고, 정치권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했죠. 전장연에 대해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하는 비문명적 불법 시위’라고 조롱했던 이준석은 김예지 의원의 행보에도 아랑곳 않고 혐오의 뜻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아실 테지만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그 역사가 꽤 깊습니다. 1984년 故김순석 열사는 ‘휠체어를 가로막는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장문의 유서를 서울시장 앞으로 남기고 자결했죠.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한국은 장애인을 비롯한 신체적 약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닙니다. 이번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는 한 명 한 명 죽고 나서야 한 보 한 보 나아지는 식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었던, 더 이상 잃을 수 없고 죽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결단입니다. 이준석이 전장연의 시위를 두고 사용한 ‘아집’과 ‘떼법’이라는 용어는 그 결단 안에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이 들어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그는 왜 알지 못할까요?


황정은의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주인공 ‘나’는 자신의 시신경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묵자’라는 단어의 존재를 인지하는데요. ‘묵자’는 맹인의 문자인 ‘점자’와 반대되는 비(非)맹인의 문자를 의미합니다. ‘나’는 오랜 시간 비맹인으로 살아왔음에도 점자는 알고 묵자는 모르는 자신의 무지를 생각해요. 왜 묵자라는 단어를 몰랐을까? 그는 그 답을 깨닫습니다.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해서 보이지 않았던 ‘묵자의 세계’를, 작가는 ‘상식의 세계’로 호명하는데요. 우리는 주로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을 ‘상식’이라 일컫죠. 이를테면 남성과 여성이 특정 나이에 결혼하는 일, 경사가 있을 때 고기를 먹는 일, 지하철이 도착하면 계단을 잽싸게 내려가는 일이요. 그런데 성소수자, 비인간 동물, 비건 vegan, 장애인, 신체적 약자들에게 앞서 말한 일들은 과연 말할 필요가 없는 ‘상식’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 아닌 ‘사유의 무능’으로 명명합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살아가면서 타자의 고통에 너무도 쉽게 무능해지는 것이죠.


전장연의 시위를 폄훼하며 ‘최대 다수의 불행’과 ‘문명사회’를 운운한 이준석 대표가 대선 운동 당시 강조했던 표어 중 하나는 ‘상식’입니다. 그토록 상식을 부르짖는 그도 언젠간 알게 될까요? 목숨을 잃어가며 투쟁해도 바뀌지 않는 사회야말로 비문명 그 자체라는 것을.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본인도 다치거나 병들거나 나이가 든다는 것을. 그때가 되면 그는 깨달을까요? 우리는 모두 취약하고, 그 취약성을 최전선으로 끌고 와 끌어안는 방식만이 최대 다수의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이런 물음을 던지다 보면 글을 쓰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일이 참으로 막막하고 면목 없어지곤 합니다. 제 글은 누군가의 갑갑한 ‘상식’도, 박탈당한 권리도 바꿔내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취약성에 관심이 있다는 키키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이 차갑고 무능하고 서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고요. 그 연결에 글이 할 수 있는 일을 믿는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놀랍게도 제가 스스로에게 느꼈던 부끄러움과 의심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키키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얘기해 주신다면 저는 키키님의 믿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을 믿는 저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편지가 오래 이어진다면 우리는 문장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너무 멋진데요? 나아가는 방법은 아주 많지만 우리가 주고받은 문장들이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저는 저도 모르는 아주 옛날부터 이 일을 꿈꿔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취약성과 글의 힘을 믿으며, 우리 같이 새로운 상식의 세계를 만들어보아요.


첫 편지라 횡설수설이지만 첫 편지니까 면죄부를 얻을 수 있겠죠? 마음껏 지적해주시면 힘껏 수정해보겠습니다. 답장이 없다면 차인 줄로 알겠어요. 차여도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생각해보니 안 괜찮네요. 차이기 전에 같이 얘기해 보아요.)


그럼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탈한 날들 보내시기를.



2022.3.29. 사하 보냄.


*사진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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