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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May 14. 2022

옳은 말은 때로 폭력이라 느껴져요

실패를 이야기할 용기를 준 사하에게

안녕하세요 사하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전에 만났을 때 곧 시험기간이라고 들었는데, 무사히 지나오셨는지 모르겠어요.


사하의 첫 편지를 읽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어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4월 21일인데, 달력을 보니 우리가 만난 지 정확히 두 달 됐더라고요. 참 신기하죠? 사하를 처음 만난 그날이 엊그제 같이 생생한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우연히 만나 우연한 기회로 점심을 먹고, 서점에 들러 책을 둘러보고. 커피와 함께 수다를 나누다가 두 달 뒤에는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걸, 2월 20일의 저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우리의 만남은 참으로 신비하고, 묘한 것 같습니다.


제가 사하에게 취약성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사하가 그런 제 말을 “우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는 말로 들어주니, 고맙고 쑥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도 사하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종종 스스로에게 부끄러움과 의심을 갖곤 합니다. 사하와 달리 저는 돌봄과 취약성에 대해 생각해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때로 말과 언어에 한계를 느껴 스스로 혼란을 겪거든요. 돌봄의 시작은 자기 돌봄이라던데, 어째서인지 저 스스로를 돌보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게 ‘업'이에요. 기후위기와 페미니즘, 장애/동물권 등을 이야기하는 글을 쓰고 있지요.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마침표를 찍는 것까지. 모두 제가 택한 업이자, 삶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구석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며 여러 기사를 짜깁기하다 보면, 이게 맞나 싶기도 합니다. 읽고 쓰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요.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진짜 내 생각인지, 혹은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쓴 것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말과 글의 한계를 피부로 느낀 순간도 있었습니다. 전에 일하던 카페에서 어떤 손님이 주문을 하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손가락을 메뉴판에 가리키면서 작게 웅얼거리셨는데, ‘말을 하면 될 걸 왜 자꾸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지?’라고 생각했죠. “저한테는 메뉴판이 안 보여서요, 말을 해주셔야 주문이 가능해요". 그런데 손님은 그런 제 말을 못 들으셨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더라고요. 그제야 그 손님이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걸 알았는데, 갑자기 몸이 얼어붙는 거예요. ‘지금 뭐 하는 거야, 손님이 당황하지 않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라고 스스로를 닦달했지만 몸이 제 뜻처럼 움직이질 않더군요. 보다 못한 동료가 자기가 대신하겠다며 주문을 받았고, 저는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고병권 작가의 <묵묵>에는 “옳은 말이 지배하면 신체가 얼어붙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를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지요. 그날이 있은 후 저는 한동안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인권을 공부하고 글로 써 온 사람이,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오히려 당사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죠. “말이 삶에 밀착하고 (...) 무엇보다 자기 말이 자기 삶에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때에야 옳은 말은 비로소 옳은 말이 된다.”는 저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실패담을 사하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어요. 저의 실없고 틀린 말이 사하에게 용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옳은 말은 때로 폭력이 되기도 하니까요. 사하 앞에서마저 자기 검열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뱉은 말을 지키고 때로 번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실패를 자주 이야기하기로 해요. 다행히 세상에는 용기 있는 선생님들이 많아서, 마침 사하에게 들려줄 좋은 문장이 있어요. 사하라면 이런 저의 실패담을 환대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인용하며 끝맺음하겠습니다. 시험 잘 마무리하시고, 평안한 하루 보내요.




나는, 사회적 의제로서의 ‘노숙인’과 실제 만나는 노숙인을 철저하게 별개로 대한다.

나는, 낡고 칙칙한 옷을 입은 남자를 일단 노숙인이라 여기고 본다.

나는, 낡고 칙칙한 것을 더럽다고 여긴다.

나는, 노숙인과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는, 노숙인의 음색이 맑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

나는, 노숙인과 술기운을 연관 지어 생각한다.

나는, 노숙인과 영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는, 노숙인을 두려워한다.

나는, 노숙인을 혐오한다.

나는, 글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심지어 편까지 드는데, 길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피하고 본다.

나는, 두려움과 혐오를 티 내지 않고 감춰서,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다.

나는, 나 대신 남에게 위험 가능성이 옮겨지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느낀다. 예순의 페미니스트 여성이 십 대 중반의 여성에게 위험을 밀어낸다.

나는, 내 안녕이 확보되는 사람만 만나고자 한다.

나는, 멀었다.


- 최현숙,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p.40, 글항아리



2022년 4월 22일

키키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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