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17화. 다시 불씨가 살아날 수 있을까

Hornillos del Camino ~ 카스트로헤리츠

by 강라곰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순례길은 아직 400km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 슬슬 이 일상이 익숙해져서 지루해져 간다. 대도시 부르고스를 벗어나자 또다시 대도시인 레온만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작은 마을은 알베르게를 영업하지 않을 수도 있고 ATM기기가 없다거나 슈퍼마켓이 일찍 문을 닫는 불상사가 많아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그에 비해 대도시는 그럴 걱정 하나 없이 편하게 머물다 가면 돼서 심적으로 편하다. 도시의 답답함에 지쳐 떠나온 여행인데 도시만을 바라보며 걷는 이 상황이 좀 우습다.

오늘은 가는 길엔 바(bar)나 슈퍼마켓이 없다고 들었다. 수중에 현금이 하나도 없어 어차피 사 먹지도 못했을 터라 아쉬움은 없었다. 목적지인 오리온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해서 쉬고자 하는 마음에 일찍 까미노에 올랐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사방이 안개로 가로막혀 사물이 구분되지 않아 공포감이 들었다. 예전에 봤던 공포영화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사건사고들이 떠올라서 망상을 멈추고 두려움을 이기고자 온몸에 힘을 주고 걸었다. 문득, 순례길을 오기 전 열심히 플레이했던 게임 ‘젤다의 전설’에서 안개가 자욱했던 날이 떠올랐다. 어떤 적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안개 낀 날의 플레이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다 싶으면 바로 다음날로 시간을 돌려버렸다. 게임 속에는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길을 걷고 있는 이 현실에서는 게임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기만을 바라며 걷는 수밖에 없었다. 안개는 좀처럼 걷히질 않았다. 오늘의 도착지인 카스트로헤리츠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푸른 평야와 마을 전경을 보여주었다.

아직 오리온 알베르게 오픈 시간 전이라 ATM기기를 찾으러 마을 중심구로 향했다. 걷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이 빠진 나는 일단 바에 가서 뭘 좀 먹기로 했다. 바에 들어가서 먼저 카드로 결제가 가능한지 물어보고 또르띠아와 커피, 얼음컵을 시켰다. 이 모든 걸 5분 내로 먹은 것 같다. 오랜만에 느껴본 갈증과 배고픔이었다. 먹고 나니 다시 걸을 힘이 생겨 ATM기기에서 돈을 뽑고 슈퍼마켓에 들려 바나나와 귤 등을 샀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는 일요일인 내일에 대비하여 여분의 먹거리도 사뒀다.

슈퍼마켓에서 오리온 알베르게로 돌아가려면 20분 정도가 걸린다. 막막해지는 거리였다. 점심으로 먹게 될 라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벤치에서 잠시 쉬며 체력을 보충한 후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나나같이 기다랗게 생긴 마을을 원망하며 걷고 또 걸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한국인 순례자들은 이미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난 어제 샤워를 건너뛰었던 터라 샤워를 하고 난 뒤 라면을 먹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먹어 큰 감동은 없지만, 느끼한 고기구이와 감자튀김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라면에 김치와 맥주를 먹고, 빨래와 건조까지 하다 보니 아까 인출한 현금을 다 써버렸다. 도저히 다시 20분 거리를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내일 가는 길에 뽑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녁 식사 전 읽은 책 [순례자]에서 사람이 꿈꾸기를 멈춘다면 영혼이 죽는다는 문구가 나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영혼은 잿더미다. 소생하기를 바라지만 이미 다 타들어가 구원할 방법이 없는 잿더미. 아직은 잿더미 속에서 불씨를 찾지 못한 기분이다. 순례길이 끝나면 다시 불씨가 살아날 수 있을까.

저녁식사로 비빔밥과 된장찌개가 나왔다. 된장국이 아닌 진한 된장찌개라서 마음에 들었다. 비빔밥은 전통식이라기보다는 퓨전에 가까웠는데, 맛이 없진 않았지만 내 한식욕구를 충족해 주지는 못하였다. 저녁을 먹고 다시 지갑에 현금을 채우러 ATM기기를 향해 20분을 걸었다. 저녁식사 소화도 시킬 겸 지금 갔다 오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걷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내일의 길을 위해서 무리하면 안 되기 때문에 물집 난 쪽이 지면에 덜 닿게끔 비스듬히 걸었다. 현금을 뽑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고양이를 발견했다. 고양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영상과 사진을 왕창 찍었다. 고양이 덕분에 귀엽게 마무리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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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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