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19화. 다시 도시로

프로미스타~레온

by 강라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쯤 눈이 떠졌다. 일찍 눈이 떠진 김에 4월 1일 이후 숙소 예약을 했다. 산티아고에서 2박, 포르투갈에서 2박을 한 다음에 4월 5일에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산티아고에서 머무는 동안 버스로 세상의 끝 피스테라도 들러볼 계획이다. 그렇게 숙소 예약을 하다 보니 같은 방 순례객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기차 시간이 정오쯤이라 미적거리며 침낭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로스 아르코스때와 비슷하게 8시쯤 알베르게에서 나와 12시까지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

어제 자기 전부터 목이 칼칼했는데 아무래도 감기 초기인 듯하다. 밤새 기침하던 같은 방 순례자로부터 옮은 모양이었다. 테라플루를 따뜻한 물에 타 마시면서 감기 기운을 조금 눌러주었다. 나를 따라 부엌으로 온 고양이 사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8시쯤 알베르게에서 나와 역 근처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 언제나처럼 아메리카노와 또르띠아, 오렌지 주스를 시켜 먹었다.

오랜만에 내 10kg 배낭을 메고 기차역까지 10분 정도를 걷는데 발, 허리, 어깨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레온에서는 더 긴 거리를 걸어야 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이 배낭을 메고 세 시간이나 언덕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레온 정도의 대도시 길은 껌이겠지.

기차역에 도착하니 역무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대합실을 열어주었다. 이 시간에 프로미스타에서 기차를 타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대합실에 앉아서 환승역인 팔렌시아가에서 뭘 먹을지 찾아봤는데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파타타 브라바스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구글 리뷰에서 추천한다는 흑맥주와 오징어튀김도 맛있어 보였다.

혹시라도 도착지인 팔렌시아가를 지나칠까 봐 계속 도착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팔렌시아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봐뒀던 식당은 높은 구글 평점답게 사람이 많았고 주문과 서빙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오징어튀김, 흑맥주, 파타타 브라바스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페인에 오고 처음으로 현지인으로부터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들었다. 순례길에서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딱히 동양인에 대해 흥미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여긴 순례자가 드문 곳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동양인들이 해외에서 느낀다던 ‘우리 안 원숭이’가 이런 느낌이구나. 대답해 주려고 파파고를 켰지만 잘 소통이 되지 않는 모습에 흥미를 잃었는지 금세 나에 대한 관심은 끊겼다. 때마침 음식이 나와서 맛을 봤다. 오징어는 살이 크고 통통했지만 비렸고 그렇게 먹고 싶었던 파타타 브라바스는 자극적인 맛이 부족했다. 결국 흑맥주만 들이키고 다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4시 4분에 출발한다는 열차는 연착되어 30분쯤에 출발했다. 그동안 계속 배낭을 멘 채로 언제 열차가 출발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려 레온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가 다 빨려 버렸다. 레온에 도착하자 승객들 대부분이 내렸는데, 입구를 찾고 사람들을 피해서 다니느라 여기서도 힘이 쫙 빠졌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20분 정도가 소요됐다. 역시나 내 체력으로는 10kg 배낭을 메고 한 번에 숙소로 갈 수 없었다. 두 번 벤치 앉아서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물집이 또 생겼는지 발바닥이 너무 아팠고 물집이 생긴 부분에 최대한 마찰을 덜 받게 하려고 발뒤꿈치에 힘을 주는 바람에 발목에 무리가 많이 갔다.

그렇게 겨우 숙소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고 숙박객들도 별로 없어서 조용했다. 열차가 지연되는 바람에 쉴 시간도 없이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다. 아시안 마트가 생각보다 멀어서 발에 무리가 더 갔다. 겨우 아시안 마트에 들러 컵라면과 나중에 먹을 비상 라면을 사고 숙소 근처 추로스 맛집에서 추로스와 초코 라테도 샀다. 레온 대성당 야경을 볼 계획이었지만 막상 성당을 보니 감흥이 없어 그냥 저녁이나 먹기로 했다. 맛집이라던 추로스는 기름 범벅에 오버 쿠킹 되어 기름지고 딱딱했다.


가는 길은 험난했지만 없는 게 없는 도시의 인프라는 편하고 좋다. 고생하러 온 순례길인데 이렇게 도시의 장점만 느끼고 떠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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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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