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21화. 작은 행복이라도 느꼈으면 된 거야

레온 ~ 산 마르틴 델 까미노

by 강라곰

레온 숙소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고 7시쯤 길을 걷기 시작했다. 레온을 빠져나오는 게 오래 걸린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배가 고파서 발걸음이 빨라진 듯하다. 인근에서 가장 평점이 좋은 카페로 들어갔는데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날 뚫어져라 쳐다봐서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화장실도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지하에 위치해 있어 불편했다. 또르띠아와 커피 맛도 그저 그랬는데 가격은 1.5유로로 단점들이 상쇄되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배를 채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메세타 구간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도로와 마을이 나왔다. 어느 구간이 더 좋다고 하기는 어렵고 둘 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오늘처럼 배가 아픈 날엔 메세타 구간은 최악의 길로 변한다. 여기는 다행히 몇 분 더 걸어가자 마을과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들린 거라 가볍게 레몬 맥주만 시켰는데 또르띠아를 서비스로 받았다.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인심이라는 걸 느껴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다시 까미노에 올랐다.

Villadangos del paramo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부터 조류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주변에 오리 농장이 있겠거니 했는데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건 검은 새들, 까마귀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이들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네다섯 그루의 나무에 지어진 수십 개의 둥지와 그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까마귀 떼를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을 붙잡고 여기 왜 이렇게 까마귀 둥지가 많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스몰토크도 못하는데 이런 걸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근처 식당에 들러 오늘도 메뉴 델디아 전식을 샐러드로 시켰다. 빠에야가 없으면 믹스 샐러드만 시키게 된다. 본식은 소고기. 맛은 있었는데 느끼하고 질겨서 반이나 남겼다. 디저트로 초콜릿케이크와 커피가 나왔는데 이걸 가장 맛있게 먹었다.


한 시간만 더 걸으면 숙박하는 마을에 도착한다. 아직 2시밖에 안 돼서 여유롭게 길을 걷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보여서 졸졸 따라갔다. 고양이가 도착한 곳은 쓰레기장이었는데 그곳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무리 지어 있었다. 대장 고양이처럼 보이는 대두 고양이의 포스에 밀린 나는 맞은편 인도로 뒷걸음질 쳤다. 중성화하지 않은 수컷 고양이는 얼굴도 크고 거기서 나오는 위압감이 있어서 다가가기 쉽지 않다. 다들 하악질은 안 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한 시간 거리는 도로 옆 오솔길이었는데 도로 양옆으로 넓은 밭과 들판이 펼쳐져 있어 걷기 좋았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데이식스의 신곡 ‘happy’을 틀었다. ‘우리가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 올까?’라는 내용의 가사가 흘러나왔다. 뭉게구름이 귀엽게 퐁실 떠다니는 이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이런 현실적인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들으니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울컥했다. 오늘 하루 분명 행복한 순간을 느꼈는데 말이다.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잠깐이나마 오늘 행복을 느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이걸로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들렀던 수많은 바와 카페에서 브금으로 나왔던 스페인 노래를 들으며 계속 길을 걸었다. 산 마르틴에 위치한 숙소는 1층에 바와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었는데 신축 건물인듯했다. 레스토랑과 침실, 화장실 모두 깨끗했다. 샤워를 한 후 숙소 레스토랑에서 레몬 맥주를 한잔 주문했다. 그러자 직원은 또르띠아를 서비스로 주었다. 아무래도 안주로 또르띠아를 주는 건 이 지역 전통인듯하다.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21화[순례일기] 20화. 달달함으로 진지한 일 회피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