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으로 요리하고 철학적으로 먹기 - 덕제 스님 3편
음식이 몸과 수행에 미치는 영향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의 대표적인 계율 중 하나이다. 스님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거나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그러한 계율에서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살생이라 함은 비단 동물이나 벌레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식물을 채집해서 요리해 먹는 것도 살생이라 할 수 있다.
“병원에서 주사를 자주 맞아본 사람이라면 힘줄도 주삿바늘을 피해 숨는다는 걸 알 거예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하려는 기운을 지니죠. 하물며 생명체인 식물이 그러한 근본 기운이 없겠어요. 식물이든 동물이든 죽는 건 같은 것이고 그 고통도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인간의 삶 자체가 살생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죠. 다만 그 업을 가급적이면 덜 짓고 살아갈 수밖에요.”
어찌 보면 살생은 존재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다른 존재의 희생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존재를 위한 살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라 그 업이 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살생이라면 어떨까.
“대학생들이 절 근처로 MT를 온 적이 있어요. 그 학생들이 절 일을 도와줘서 제 방에서 차를 대접하는데 한 여학생이 손이 퉁퉁 부은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모기한테 물렸대요. 그래서 그 모기를 그냥 놔뒀냐고 했더니, 한 남학생이 그럼 잡아도 되냐고 물어요. 그래도 된다고 답했더니 손바닥으로 모기를 사정없이 내려쳐서 죽였죠. 그래서 잡고 나서 느낌이 어떠냐고 하까 ‘좋죠’라고 하는 거예요. 쾌감을 느꼈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 경우라면 어떨까요? 생명을 잡아 죽이는데 마음이 아프기보다 희열을 느꼈다면 그건 제대로 살생한 거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살생을 해야 한다면, 살생 아닌 마음으로 살생을 할 수도 있다. 최소한 죽임을 당하는 생명체에게 원망 어린 마음을 덜 심어줄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모기를 죽여야만 할 때 저라면 차라리 이런 마음을 갖겠어요. ‘미안하지만 내 손에 살포시 가서 다음 생엔 더 좋은 몸을 받아라’ 하는 거죠. 사실 모기도 존재를 위해 남의 피를 취하려는 것이니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겠지만요. 어쨌든 살생에 앞서 전투적인 모드보단 애도의 모드가 좀 더 업을 덜 짓지 않겠어요. 모기 같은 미물이 설마 그런 마음을 알까 싶겠지만, 마음의 기운은 그대로 전달되는 거예요. 죽음의 그 짧은 찰나에도 말이죠.”
불교의 가르침은 ‘앎’이다. 불가의 공부는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알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시작으로 만물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존재임을 알게 한다. 그러한 이치만으로도 음식이 수행에 영향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참선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음식을 가리게 돼요. 육식은 무엇보다 활동적 기운 때문에 가리게 되지만, 인스턴트식품이나 밀가루는 방부제 때문에 더욱 금하게 되죠. 방부제는 몸속에서 정체의 역할을 하니까요. 음식이 체내에 들어가 영양분이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축적되거나 배설이 돼도 제대로 썩지를 않죠.”
그런 음식을 항시 즐기는 사람들은 그 부작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동안 안 먹다가 먹어보는 것이다. 3개월만 화학조미료나 파, 마늘, 젓갈, 육식, 밀가루, 인스턴트 등의 음식을 제외한 자연식 위주의 식사를 해보는 것이다. 그런 후에 다시 그 음식들을 먹어보면 당장 알아차리게 된다. 몸이 쳐지면서 배가 더부룩하고, 정신이 산란해지며 졸리는 등의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양받은 음식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분별심을 낼 수는 없어요. 선방에서 생활하면 많은 음식들이 절에 보시되는데, 빵도 자주 들어오는 편이에요. 그럴 땐 밀가루 음식을 삼가더라도 조금이나마 먹어요. 정성으로 공양 올린 음식이기에, 그게 독인 들 마다할 수가 없는 거죠.”
부처는 절에 공양된 음식들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비록 독이 되는 음식일지라도 수많은 인연과 모진 시련을 거쳐 내게 온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처는 공양 올린 음식이 상했을지언정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나. 그것을 먹고 죽음에 이를지언정 그렇게 몸소 보여주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