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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적 Jun 13. 2023

여전히 교복 입은 스무 살

나를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삶

딱히 이렇다 할 근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렸던 그때의 나는 앞으로 분명 특별하면서도 비범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믿음은 사실 간절한 바람이자 소망이었던 것 같다. 그때 가졌던 바람만큼 그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 되어내지는 못했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내가 가진 욕심만큼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그저 발생하는 상황에 휩쓸리듯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를 바라봤을 때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점이 셀 수 없이 많지만 다행히 그것이 나를 향한 미움으로까지 번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 결과를 손에 쥐지 못했더라도 내가 지나온 여러 삶의 길들은 상당히 예사롭지 않았고 그것이 나를 꽤나 구별되도록 했다는 나름의 만족감에 기인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다. 




일반 중학교에 진학한 지 갓 1년이 지났을 무렵 한국에서 아무런 인가도 받지 않은 대안한교로 전학을 갔다. 중고등 과정이 연계되어 있던 그 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그때 만난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과 인생의 가장 감사한 시간을 보냈다. 


졸업학기에는 정말 특이한 상황에 놓여 재밌고 또 불편한 6개월을 살았다. 당시 다니던 학교는 미국의 정규 교과과정을 따랐다. 미국 학교의 새로운 학년 첫 학기는 하반기에 시작했고 이 때문에 나는 법적 성인인 스무 살이 되었음에도 그해 상반기는 여전히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으로 살았다.

(현재는 학기시작일을 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책임이 뒤따른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뒷전이었고 마냥 스무 살이라는 이름이 주는 더 많은 자유와 줄어드는 제한이 너무나 나를 설레게 했음에도 그놈의 교복이 항상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집 근처 정류장에서 이제는 대학생이 된 과거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나의 상황을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했고 잘못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별 까닭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영화관에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갓 성인이 되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설레는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나에게도 역시 그랬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그 해 개봉했던 영화 "신세계"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교복 재킷과 셔츠를 벗어 가방 깊숙이 넣어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장하려 했지만 영락없이 영화관 직원에 제재를 받았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 모두가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교복바지를 입고 등에 책가방을 메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고등학생의 모습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둘러 주민등록증을 들이밀었고 여전히 떨떠름한 직원 앞에 나는 혹시 몰라 챙겨갔던 병무청 신체검사 통보 우편까지 보여주며 가까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스무 살에 여전히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상황은 내가 봐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는 너무나 큰 불편함이었다. 그 기간 동안 제 발 저리듯 항상 눈치를 보았고 나를 설명하고 상대를 납득시켜야 하는 일을 연속적으로 맞이했다. 


그해 상반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서야 졸업을 하고 지긋지긋했던 교복을 더 이상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 당시가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느끼는 데는 지금껏 나와 함께해 주는 친구들의 존재도 있겠지만 교복을 벗은 후에도 그때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문제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교복만 입지 않았지 여전히 나를 설명하고 상대를 납득시키일에 급급하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식의 오만한 태도로 어릴 적 내가 소망했던 높은 기준에 얽매여 나를 포장하고 현재의 나의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상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무의미한 노력을 참으로 오랫동안 해왔다.


드라마 이태원 클래쓰에서 주인공 박새로이는 "네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라고 말한다. 이 울림 있는 대사가 스무 살 교복을 입으며 너무나 불편했던 당시를 떠올린 지금에서야 나에게 선행되는 조건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나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을지언정 나 자신은 나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이다. 


내 속에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나 자랑스러운 나의 한때를 지금의 나인 것 마냥 다른 누구에게 설파했다. 


어딘가 불편하고 자연스럽지 않았던 내 삶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교복을 더 이상 입지 않음에도 참 오랫동안 여전히 그때의 그 불편함을 안고 살아왔다.


내가 나에게 원하는 변화조차도 지금의 나를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말 그 교복을 벗고 정말 나로서의 걸음을 떼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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