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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적 Nov 18. 2022

실패라 말하기 전에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을 떠나오는 것이 아쉬움이 많이 남았으나 마냥 그런 상념에 젖어있기에는 그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는 항공권을 구매할 때 홍콩에서 환승해 인천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뉴욕 인천을 잇는 직항의 절반 가까이 저렴한 가격이었고 부모님은 스탑오버 시간을 길게 가져 여행을 하고 오라고 권유하셨다. 그렇게 난생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그것도 유튜브 영상을 수도 없이 보며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홍콩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주 큰 기대를 가졌다.




설레는 여행을 앞두었지만 뉴욕에서 홍콩까지 16시간이나 되는 내 인생 최장 비행시간은 걱정거리였다. 아무 곳에서나 머리만 닿으면 잘 자는 나였지만 긴 비행은 늘 극심한 답답함과 지루함을 견뎌내야 했다. 나의 계획은 최대한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비행기에서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비행 당일이자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맨해튼 구석구석 가보지 못한 곳을 다 누볐고 비행시간에 맞춰 뉴어크공항으로 이동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계획은 성공이었다. 비행 대부분의 시간을 잠에 들었고 그 덕에 빠르게 시간이 지나 홍콩에 도착했다.


그 시기는 딱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된 시기였고 모두가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공항 티비 화면에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고 주의하며 여행하고자 마스크를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약한 숙소가 위치한 홍콩섬으로 이동한 후 짐을 풀고 근처 편의점에 마스크를 구입하러 나섰다. 가는 곳마다 마스크는 품절이었고 그렇게 길을 헤매다 어느새 다음날 방문을 계획했던 홍콩 명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오직 마스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고 매번 끊겨있는 구간마다 편의점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미드레벨 꼭대기에 위치한 편의점에 가서야 겨우 마스크를 구할 수 있었다. 비로소 목표를 달성하고 이왕 나온 김에 주변에 유명하다는 완탕면 식당에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내 입이 유별난 건지 도무지 한 그릇을 다 비울 수 없는 맛이었고 그렇게 실망감을 가지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걷던 와중 또 다른 이튿날 방문을 계획했던 만모사원이 보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기에 홍콩 고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악몽의 시작이었다. 방문객 하나하나가 분향을 위해 향초를 들고 입장했는데 인파에 밀려들어간 사원 안에서는 향연기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만성 비염환자인 나의 코도 향초의 독한 냄새에 훌쩍훌쩍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 겨우 사원에서 빠져나왔다. 그때부터 나의 몸은 맛이 갔다. 비행 때 잠을 많이 잤지만 그 좁은 자리에서 자는 잠은 오히려 피로를 누적시켰고 예상치 못하게 늘어난 첫날 여행 동선의 길이는 나의 몸을 단단히 탈이 나도록 했다.




내가 경험한 가장 독한 몸살이었다. 그렇게 사흘을 호텔방에 누워있었고 간신히 기운을 회복한 나흘째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여행을 시작했다. 애초의 빽빽하게 계획해두었던 여행 일정은 모두 틀어졌고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발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여행을 했다. 나의 홍콩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었냐면 홍콩섬 서쪽 끝 부근에서 동쪽 끝까지 트램을 타고 하염없이 거리를 바라보며 지나온 일이었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트램이 주는 고유의 분위기와 여유로움을 즐기며 이동하는 그 느낌이 뜻밖에 아주 큰 만족을 주었다.


나의 여행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각해보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던 것은 혼자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는 나였다. 유명 관광지나 맛집 방문이 아닌 나를 마주하는 것이 여행의 목표라니 나도 참 별나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종종 마주하는 일이 의외의 큰 만족감을 주기에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여행에 대한 기대이자 목표였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고 내가 기대했던 목표를 명확하게 바라보자 분명 원하는 바를 이루었던 여행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계획대로 변수 없이 일정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내게 정반대에 상황이 발생했고 마음을 내려놓은 와중에 트램이 주는 낭만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부수적이고 자극적인 것들 때문에 애초 내가 바라고 이루려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때가 있다. 그것들이 주는 혼란이 명확하게 사안을 분석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도 그 일을 실패라 규정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돌아보니 내가 실패라 규정했지만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일이 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려 이전에 사용하던 핸드폰을 켰는데 놀랍게도 찍은 사진이 없다... 이렇게 낭만이 1도 없는 내게 홍콩 트램에서 느낀 낭만은 너무나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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