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짱ㅣ원시인 Jun 08. 2023

메달 사냥꾼의 은밀한 슈필라움

나만의 슈필라움! 이곳!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반드시 말이야!

나는 녹색 우레탄 바닥을 그린카펫이라고 부른다. 가끔 레드카펫(자전거 도로)과 블랙카펫(보행자, 자전거 겸용 도로)도 있다. 뭐 아무렴 어떠랴! 안전하게 걷고 잘 달리고 타면 되는 것을..


나는 안전을 위해서 그린카펫으로 달린다.

자전거에 부딪히는 것보다 사람에게 부딪히는 것이 덜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그린카펫 위를 달리지만 마라톤 대회 나갈 때는 마음 놓고 아스팔트를 누빈다. 이때만큼은 블랙카펫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짜릿한 기회이다.


2020년~2021년까지는 코로나19 때문에 각자의 처소에서 달리는 언텍트 대회였다. 덕분에 대회 코스가 아닌 내가 뛸 수 있는 장소 어디에서든 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참가비 입금하고 택배로 배번, 기념품 받고 내가 원하는 코스 아무 곳에서 대회기간 내 열심히 완주하면 끝이다. 물론 대회라는 긴장감은 없어서 심장의 쫄깃함은 덜하지만 말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대회에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어쩌다 동호회나 러닝 크루 모임 같은데 나갔다 하면 달리기 선배님들의 무용담에 하나둘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대회날 출발선에 서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이때 정신 차려 여긴 어디 나는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출발 총소리가 들리며 내 다리는 내 의지가 아닌 출발소리에 이끌리어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니 떠밀린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어쩌다 동료와 함께 그렇게 그렇게 사람에 흘러 다니다. 어! 어~어~~~ 다들 어디 갔지? 결국 각자 자기 페이스 독고다이 솔로잉이다.


완주를 하고 받은 메달은 이게 뭐라고 나를 기쁘게 만든다. 포토존에서 완주 기록과 인증샷은 필수다. 하나 둘 생긴 메달을 보며, 또 이게 뭐라고 컬렉션을 시작한다. 가끔은 달리기 위해 대회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메달 수집을 완성하기 위해 참가신청 버튼을 꾹 누른다. 그렇게 메달이 늘어간다. 메달 수를 헤아리며 대회날 고통을 상기한다. 그리고 희열을 느낀다.


그 순간이 온다면 달리기 중독자 진단을 받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처음 4km를 달리고 6km를 달리다 조금 용기가 나면 8km로 늘리고, 두 자릿수로 늘리기에는 심리적 요소가 컸을까? 조금 주저하며 10km를 넘는 순간 나도 이제 전문적 러너로 진입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보통 짝수 km를 뛰게 된 이유는 집 앞 현관에서 반환점 형태로 달렸기 때문이다. 반환점을 돌아 찍고 턴을 하였기에 짝수로 거리를 늘렸다. 재미있게도 우리 집 현관에서 6km를 달리면 한강을 만나게 된다. 한강을 반환점으로 삼아 집에 다시 오면 12km다. 이 거리가 내 기본 거리가 되었다. 평소에는 12km, 큰 마음먹고 달리면 하프다.


마라톤 대회에 하나둘 참가하다 보면 대회 주관사에 꽤 괜찮은 영업 데이터가 된다. 매번 날아오는 대회 홍보 문자와 오픈톡이 업무로 잊고 지냈던 대회날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일방적 폰(phone)에 담기는 문자 메시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문자본 후 한번 들어가 볼까? 링크를 누른다.


대회 일정과 기념품을 살펴보다 보면, 어느덧 참가비를 입금해 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일상에 파묻혀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 속에 파묻혀 지내다 어느덧 다가온 대회는 또 그렇게 메달하나를 갖고 오게 해 준다. 메달은 마구마구 쌓이게 된다. 메달 인플레이션이다. 이게 뭐라고 하나둘 모으는 재미로 난 오늘도 달리고 달린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그 순간은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된다. 내가 달리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핸드폰 속 알림 홍수로부터 해방이 되고 지나가는 사람도 날 알아보지 않는다. 비 온 뒤 울리는 개구리의 짝짓기 소리가 정겹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달리는 시간만큼 거리만큼 말이다.


나만의 공간을 독일에서는 슈필라움(Spielraum)이라고 한다. 슈필라움은 다른 이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놀이공간이라는 뜻이다. 독일어의 슈필(놀이)과 라움(공간)이라는 명사 합성어이다. 달리는 그 순간은 나만의 놀이공간이고 내 세상이며 나 혼자 웃고 울고 마음껏 소리도 지르고 대화하는 그런 공간이고 이곳에서 나의 생각들이 날개를 피며 펼쳐 올라간다. 하천에 펄떡 튀어 오르는 물고기와 푸드드득 날아오르는 흑오리 때들을 바라 본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초들과 눈 맞추며 대화한다. 그렇게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달리기에 미쳐간다. 하지만 달리는 모든 시간에 나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가 사실 진짜 정답이다.


러닝 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 거친 숨소리와 달리기를 위한 대근육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숫자를 센다. 얼마나 달렸나? 완주하려면 지금까지 달린 만큼 또 달려야 한다. 매번 달리는 거리지만 사실 늘 숫자만 센다. 1km 남았다 마지막 스퍼트? 아~아아앗!! 늘 그렇지만 10km든, 15km든, 하프든 풀코스든 피니쉬 라인 2-3km 지점이 제일 힘들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지막 그 지점이 생각나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달리는 동안 온갖 잡생각을 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며칠 전 일로 땀이 흐르듯 울기도 하며, 퇴근 전 나눴던 그녀와의 챗으로 웃기도 하며 달리지만, 사실 나만의 공간과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상하리 만큼 역설적이게도..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 무의식 속에 머릿속에 스쳐가는 기억,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나를 깨운다. 나는 은밀하게, 그리고 그렇게 달린다.


나만의 슈필라움! 이곳!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반드시 말이야!




이전 10화 불멸의 채찍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