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병일 May 17. 2024

16. 전복죽, 시어머니를 위한 며느리의 ‘계획’

          


  계란찜을 하기로 한 날 아침에 K는 10분 일찍 잠에서 깼다. 아내에게 배운 대로 계란 4개를 풀어 넣고 물을 부은 후 액젓1/2숟갈과 파, 치즈를 넣고 전자레인지에 5분 돌려서 계란찜을 완성했다.

  K의 어머니는 이가 들뜨고 잇몸이 부어서 밥을 잘 먹지 못했고 계란찜만 조금 삼켰다. 아침을 먹지 않는 K의 아내는 그동안 잠을 더 잤다.


  어머니가 출근하는 K에게 집에 올 때 소염진통제를 사오라고 했다. 출근 준비를 하다 그 말을 들은 K의 아내가 어머니 약봉지를 확인한 뒤 남편에게 말했다.

  “약사한테 이거 보여주고 약 지어달라고 해. 어머니 드시는 약에 소염진통제가 있기 때문에 더 드시면 안 될 수도 있어.”

  아내의 조언을 들은 K는 핸드폰으로 약봉지의 약 목록을 찍고 출근했다.     


  수업이 빈 시간에 K는 학교 근처 약국에 가서 약 목록을 보여주며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약사는 지금도 충분히 드시고 있기 때문에 더 드시면 안 된다며 약을 처방해 주지 않았다. 아내의 조언이 없었다면 K가 생각 없이 약을 지어갔다가 어머니 몸에 탈이 생길 수도 있었다.


  K는 자신과 아내가 어머니의 수술 후 건강 회복에 협업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K의 아내가 요리 등 어머니 부양을 전담하고 있었다면 어머니 약 드시는 일에 대해서까지 세심히 살피지 못했을 것이었다. 돌봄 노동을 가능한 아들이 전담하려 한 것이 며느리로 하여금 시어머니에게 더 마음 쓰는 일을 가능하게 했을 터였다.     



  K는 퇴근하자마자 미리 생각해 둔 어묵조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묵을 담은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부어 놓은 후 양파를 썰었다. 곤약을 작고 얇게 썰어 놓은 뒤 뜨거운 물로 기름기를 뺀 어묵도 알맞게 썰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른 후 양파를 볶았다. 곤약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고 볶다가 어묵을 넣고 더 볶았다.


  그새 도착한 K의 아내는 어머니의 입안이 어떤지 살피고 격려를 해 드리는 일을 먼저 했다. K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밥을 못 드시리라는 걸 예상하고 순두부를 전문점에서 사 오기도 했다. K는 머릿속 계획대로 어묵볶음 만들 생각밖에 하지 못한 자신이 어리숙한 요리사였음을 깨달았다. 이와 잇몸이 아픈 어머니가 씹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는데 말이다.


  조금 아프다 낫겠지 했던 어머니의 입안은 점점 상태가 나빠져 갔다. K의 어머니는 두 시간 전 먹은 고구마 때문에 저녁을 함께 들지도 못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더 기운이 빠져서 통증 감내하는 일도 점점 더 힘들어졌다.     



  7시쯤 도착한 물리치료사 손자가 무릎을 주물러 드리자 K의 어머니는 마음을 안정을 조금 찾는 듯했다.

  “할머니, 다른 분들은 더 힘들어 하세요. 할머니는 훨씬 나으신 편이에요.”

  손자의 말에 K의 어머니는 더 기운이 나는 듯했다. 한결은 할머니 상태가 안 좋으셔서 오늘은 도수치료를 쉬는 게 좋겠다고 진단을 내렸다. 치료사가 무릎을 만져 주고 안심시켜 드리자 K의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기력을 찾은 모습으로 거실로 나왔다.


  텔레비전을 좀 보다 안방으로 들어간 어머니가 여덟 시쯤 배가 고프다고 했다. K의 아내가 수제 순두부에 간장으로 양념을 해서 어머니 침대로 갖다 드렸다. K가 애써 준비한 어묵조림과 김치찌개는 무용지물이었고, 아내가 사 온 순두부가 어머니의 요긴한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순두부를 먹고 난 뒤 K의 아내는 애호박을 넣고 쌀로 흰죽을 끓여 다음날 드실 양식도 준비해 놓았다. 그동안 설거지와 청소는 K가 전담했다.          



  다음 날 아침 K는 전날 먹던 반찬과 애호박 죽으로 어머니의 아침을 차려 드렸다. 자신은 냉동실에 있던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입 안이 헐기 직전이 된 K의 어머니는 흰죽을 삼키는 일도 버거워했다. 겨우 죽 그릇을 비운 어머니가 겁먹은 얼굴로 아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병원에선 끼니마다 고기랑 생선이 나왔어. 엄마 이렇게 먹다간 죽어. 이렇게 먹고 못살아.”


  K의 어머니는 지인들이 잘 먹어야 산다고 했다며 죽을상을 했다. K가 아내가 자고 있던 방을 쳐다보며 “네,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K는 아내에게 생선 요리를 해 달라거나 생선 굽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에 드실 단백질 좀 준비해 놓을게요.”


  밥을 먹다 일어난 K가 전날처럼 계란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어제 계란찜이 싱거웠다며 좀 짜게 하라고 말했다. 계란과 물을 푼 뒤 액젓을 어제보다 조금씩 더 넣으며 K는 계속 맛을 보았다. 적당히 짠맛이 느껴졌을 때 치즈 3장을 넣은 뒤 전자레인지로 5분 돌렸다.


  식탁에 계란찜을 올려놓은 뒤 K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전날 제주도 여동생이 보내준 소고기 팩이 냉장고에 열 개나 있었다. 어머니가 드실 수가 없어서 소고기를 구워 드리지 못한 거였는데, 고기와 생선 반찬이 없다고 투정을 하신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난 K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학교에 도착한 K는 아내에게 ‘어머니가 고기와 생선 반찬을 해달라고 하시네, 생선은 내가 해보지 않았으니 당신이 해주면 좋겠는데’라는 문자를 보낼까 잠시 고민했다. 그는 곧 카톡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에게 비난으로 느껴질 여지가 있는 말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K는 열한 시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에 본죽 소고기죽이나 전복죽을 배달해 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냥 흰죽과 계란찜을 먹겠다고 했다. K가 저녁 모임을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저녁에 소고기 많이 넣고 미역국 끓여 드릴게요.”

  어머니는 미역과 소고기를 잘게 썰어서 끓여 달라고 아들에게 요청했다.


  전화를 끊고 난 K는 모임 선생님들 단톡방에 어머니 사정을 설명하고 참석을 못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나중에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그날 오후 네 시에 학교폭력 화해 조정 작업이 있었다. 학부모들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생활부장인 K으로선 서두를 수 없었다. 그러다 화해 조정이 실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5시가 넘어서 화해 조정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K는 평소 걸어 다니던 길을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서둘러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가 전복을 씻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전복죽을 끓여 드리기 위해 씻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K의 아내에겐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K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아침에 카톡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은 자신에 대해 대견함을 느꼈다. 어머니께 생선 요리를 해 드리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냈다면 아내의 가슴에서 전복죽을 사러 갈 마음이 싹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전복죽을 끓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K는 아내에게 비난으로 느껴질 것 같은 문자를 보내지 않았던 선택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K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정성껏 끓인 전복죽 앞에 앉아 기대에 찬 얼굴로 한 술 떠서 먹었다. 진하고 고소한 전복의 감칠맛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안이 너무 헐어서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K의 어머니는 전복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몇 숟가락 먹을 수 있었다. K는 전복죽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나마 조금 드실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전 15화 15. 해물된장찌개, 무릎 수술한 어머니의 입맛을 돋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