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푸젤리 <악몽>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나는 태어났고,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내가 태어난 기억조차 허락받지 못할 심신 미약 상태로 세상에 던져졌다. 기억조차 없는 돌잔치에서는 돌잡이도 강요받았다. 그 후로도 어른들은 항상 나의 미래를 걱정하셨다.
교사가 된 이후 나도 오랫동안 학생의 미래를 걱정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수업을 바꾸기보다 말이 쉬었다. 하지만 충고랍시고 던진 말은 가끔 협박이었다. “커서 뭐 될래?” 혹은 “밥 빌어먹기 딱 알맞다.”같은 말은 학생의 가슴에 날린 살이었다.
헨리 푸젤리의 <악몽>에는 젊은 여성이 얼굴과 팔을 침대 끝 아래로 늘어뜨린 체 잠들어 있다. 여인의 가슴에 앉은 몽마(인큐버스)는 이 여성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이 악마는 이 여인은 이미 자신이 선택했으니 관심을 끄라는 듯 우리를 쳐다본다. 그 뒤 붉은 커튼 사이에는 초점 없는 눈의 말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 여인은 헤어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에 빠져있다.
학생은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등학생이 되면 대학 입시 과정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평가한다. 하지만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졸린 눈으로 등교한 학교의 일과는 빈틈이 없다. 여백이 있으면 학생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한 책임은 학생과 학부모가 아니라 오롯이 교사의 몫이다. 아이들의 창의적 행동은 결사코 막아야 하는 것이 학교의 큰 구조적 문제다. 가능한 학교는 학생을 경마장의 말처럼 한 곳만 바라보고 달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쩌다 학교가 아이들의 몽마가 되었다.
꿈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꾸게 해야 한다. 꿈꾸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자유다. 학생은 자유롭게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면 당연히 의사, 판사가 되고,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꿈이 될 수 없다. 그건 그야말로 직업 희망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 번의 인생을 처음 살아 본 기성세대가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자신이 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게 기회를 줘야 한다. 학교는 자신의 꿈을 평가 받는 곳이 아니라 학생이 자유롭게 꿈을 꾸는 기회의 장이어야 한다.
<악몽(The Nightmare)>
예술가: 헨리 푸젤리(John Henry Fuseli, 1741년~1825년)
국적: 스위스
제작 시기: 1781년
크기: 101.6×127㎝
재료: 캔버스에 유화
소장처: 디트로이트 미술관(Detroit Institute of 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