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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고씨 Oct 05. 2021

비건을 하랬더니 여행자가 되었다

일주일에 딱 하루만큼은 서울에 가야 한다고요

역마살이 낀 선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서울에 가야 하는 병이 생긴 듯했다. 나가봐야 비건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근처 공원에서 산책한 후에 돌아오는 일이지만 그뿐이어도 3시간 왕복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에게 서울은 여전히 꿈같은 공간이었다. 

     

  경기도인은 인생의 1/3을 대중교통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다. 듣을 땐 웃어넘겼지만 겪어보니 정말 사실이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2시간을 위해 3시간을 버스와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으니 나는 점점 배낭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가방 가득 충전기며 책이며 담요를 챙기고 광역버스에 올라타는 일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서 서울로 향하는 의식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은 친구와 파스타를 먹자고 약속을 잡았었다. 하필 장마기간인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기록적인 폭우가 예상되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가자마자 장대비가 엄청 쏟아지기 시작했고 자꾸만 걸을수록 신발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가려고 했던 비건 레스토랑은 버스로 환승을 2번이나 해야 했다. 처벅처벅 하는 발걸음의 소리가 우리를 집어삼킨 건지 나와 친구는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사방에서 부는 바람과 장대비의 합작에 우산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야 도착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문을 마치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온몸 가득 묻어있는 물기를 털어내기도 하고 젖은 신발에 휴지를 넣어 물기를 닦아내기도 했다. 양말은 이미 쓸모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거울을 보니 웬 거지가 서있는 듯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의 은은한 노란 조명과 세면대에 있는 디퓨저에 있는 꽃과 나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정말 외국에서 온 배낭여행자라고 해도 이보단 깨끗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튼 파스타며 비건 버거며 나오는 음식마다 감탄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배가 부르고 어느 정도 옷이 마르니 그제야 맞은편에 앉은 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인 모양새였다.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친구도 험한 꼴이 되어있었고 나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돌아갈 길이 막막한 것도 잠시 우리는 또 금세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집보다 편안한 버스에서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날의 고생은 까맣게 잊은 듯 다시 또 비 오는 날의 외출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파스타를 먹으러 외출하는 길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파스타가 먹고 싶다는 말을 금기어로 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날의 외출이 생각나면서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행선지를 확 틀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에 비건 쌀 국숫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나에게 이태원은 JTBC에서 방영했던 ‘이태원 클라쓰’ 혹은 연예인 홍석천 씨의 가게가 있는 위치쯤이었다. 왠지 외국인들이 거리마다 가득할 것 같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클럽들이 가득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생각했었다. 역시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던가. 처음에 갔던 이태원은 비가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조용하고 한적했다. 생각보다 좁은 골목에 이국적인 가게들이 주르륵 이어져있고 비건 식료품을 파는 가게도 보였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다녀온 곳이 메인 거리에서 한참을 벗어난 곳이었다.

 

  다음에 또 이태원을 찾았을 때 역시 이태원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끝자락이었다. 앤틱한 외국 가구들과 조명들이 가득했던 골목이었다. 서울에 살았던 친구도 이런 동네는 처음 와본다고 했다. 정말 비건이 되지 않았으면 올 생각도 없었을 거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한적한 외국 동네의 플리마켓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갖가지 가구들과 조각상들이 거리에 나와있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직까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망원동이다. 비건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망원동은 생각보다 비건 음식점들이 많이 모여있다. 거기다 비건 디저트 가게며 카페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 지 모른다. 서울이라면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게 높은 건물들만 생각해왔었는데 근처에 망원 시장도 너무 정겹고 주택들도 아담해서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와 제일 맞지 않는 곳은 삼성역 근처였다. 도로는 어찌나 넓은지 차들이 고속도로만큼 꽉꽉 차있었으며 위로는 높은 빌딩과 호텔들이 나를 잡아 삼킬 기세였다. 높은 층에 위치했던 식당에서 바라본 모습은 정말 기하학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도마다 새겨진 가이드라인이 얼마나 현대적이었는지,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근처에 공원 하나 발견하지 못하고 터덜거리던 친구와 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서울의 지하철 풍경은 여전히도 낯설다. 가끔 한강을 지나갈 때면 고개를 돌려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저 멀리 풍경을 보다 앞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멋쩍게 고개를 돌려야 할 때도 있다. 모두가 익숙한 생활 반경인 서울에서도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는 것, 지방 사람의 특혜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특히 동작역을 지나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좁은 창으로 보이는 너른 한강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니.’ 하고 말이다.



      

  내일도 길을 나선다. 


  이번엔 회기역에 있는 ‘춘천 막국수’ 집을 향해서 또 먼 길을 갈 채비를 한다. 왕복 4시간 정도 되는 거리지만 근처에 채식 중국집도 있다니 간 김에 저녁까지 먹고 올 예정이다. 근처에 또 대학가도 있다고 하니 좋은 구경을 하고 올 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디든 좋은 여행지가 되는 셈이다. 


  새로운 곳에서 또 한 번 쌓게 될 추억들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잘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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