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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고씨 Sep 30. 2021

캐리어에 먹을 것만 가득 채운 이유는

해외여행 아니고 국내 여행입니다만

  코로나19로 인해 바뀐 것이 있다면 아마도 여름휴가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매번 TV로 보았던 북적북적한 해운대의 풍경 하나 없이 지나가는 여름이란 정말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여름휴가를 포기하고 나서 아쉬운 마음보다는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고 코로나에 걸릴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렇게 집에만 있는 시간을 보내다 갑작스레 친구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에 다녀오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여름휴가 시즌이 다 지난 8월의 끄트머리 즈음이었다. 강릉과 고성 어디쯤, 사람들이 붐비는 유명한 명소가 아닌 아주 한적한 그런 시골 동네였다. 

     

  약속을 정해놓고선 또 끼니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똑같은 고민이긴 하지만 숙소를 잡아두고 지도를 살펴보는데 깜짝 놀랐었다. 10분 거리에 편의점 하나 겨우 있는 생각보다 정말 더 시골 동네였으니까. 약간 여행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고향이 남쪽인 탓에 강원도 여행은 정말 처음이었다. 어릴 적에도 해운대와 같은 유명한 곳만 다녀온 기억이 있어 번화가가 아닌 바다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차가 없어서 뚜벅이 여행으로 또 그 흔한 김밥집 하나 없는 곳으로 가는 일은 여름휴가라기보다는 모험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일정을 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캐리어 가득 먹을 것들을 싸는 일이었다. 


  급기야 무엇을 먹을지 식단표를 적어두고 이것저것 배송을 시키기 바빴다. 최대한 가볍게, 다양하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단을 짜기 위해 이리저리 신경을 썼다. 요리는 되도록 하지 않았으면 해서 간편 식품을 위주로 가방을 꽉꽉 채우기 시작했다. 아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김부터 반찬 통조림까지. 해외여행을 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배송이 늦어지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아무래도 출발하기 전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걸 몽땅 들고 가자는 심정으로 냉동실이며 냉장고를 탈탈 털어 챙겼다. “물놀이 후에는 역시 컵라면이지!”를 외치며 비건 컵라면부터 챙기고 여행 내내 굶을까 노심초사하며 즉석밥을 여러 개 사 왔다. 혹시 몰라 비건 초콜릿도 넣고 과자도 넣고 반찬으로 먹을 비건 제육볶음도 아이스팩에 가져갔다.   


다 먹고 돌아올 줄 알았다....

   



  강릉에서 내려서도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들어간 곳은 정말 30년은 더 전으로 돌아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숙소에 들어가니 정말 너른 바다가 한눈에 탁 보였다. 아주 넓고 한적한 바다였다.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물놀이를 시작했다. 휴가철이 다 지나고 도착한 바다는 정말 생각 이상으로 차가웠다. 준비해왔던 수영복들이 무색하게도 거센 파도에 치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기억만 난다. 


  어릴 때도 무서워했던 바다는 커서도 똑같았다. 옆에 있던 어린 친구보다 악을 더 많이 질러야 했으니까. 나이만 든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구나를 또 한 번 실감했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컵라면은 무슨, 열심히 이고 지고 간 보람이 없게도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끊임없이 잠에 빠졌다. 흡사 운동회를 마친 후의 밤 같았다. 


  친구는 그사이에 근처 편의점도 들려 단무지 하나와 깻잎 장아찌를 사 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몽사몽으로 눈만 겨우 떠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아침부터 캐리어를 끌고 4시간 만에 도착해서 물놀이 30분에 하루가 끝나다니.   

   

  정신을 차리고 비건 제육볶음을 데워서 같이 먹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대로 뜯어먹었다. 콩고기의 장점은 익혀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괜찮아서 서로 놀라며 밥을 먹었다. 약간 말랑한 육포를 먹는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날도 역시 열심히 캐리어를 끌고 속초로 이동했다. 근처에 유명한 속초시장까지 열심히 걸어갔는데도 별 소득 없이 돌아왔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줄 서있는 많은 사람들이 부럽긴 했다. 


  요즘은 뭐가 인기가 있는지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다가 문을 연 떡볶이 집마저도 없어서 챙겨 온 즉석밥에 남겨놓은 깻잎장아찌를 먹기로 하고 터덜터덜하며 30분을 걸어 돌아왔다. 맛집 투어는 무슨, 이렇게는 정말 집이랑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다. 창가에 호수가 있다는 것만 빼고는. 



    

   맛집을 못 가는 대신에 명소로 소문난 문우당 서점을 두 번이나 들르게 되었다. 밥을 먹는 시간이 줄어드니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고 바깥에 관심이 가득해졌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또 고르고 다음 날에 다시 들러 스스로에게 선물할 책을 하나 더 골랐다. 서점 여기저기 책을 애정하는 이들의 따스한 언어들이 나를 반기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이런 공간을 만들면 나에게도 오는 이에게도 정말 행복하겠다 싶어서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마음속에 채우고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챙겨간 음식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집 한편에 쌓여있는 즉석밥을 생각하면 그날의 간절함이 정말 웃기기도 하다. 캐리어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그 주 내내 왠지 모를 근육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음 여행에는 어떤 맛있는 음식을 챙겨 가볼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여행은 계획을 할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막상 떠나고 보면 일정대로 소화를 하느라 많은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빈틈이 가득했던 여행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러한 점들이 또 나름의 추억이 되었다. 


  인생도 그렇게 예기치 못한 기회들과 행운 속에서 채워나가고 싶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렸던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최고로 맛있는 야채비빔밥을 먹었던 일처럼 말이다. 힘을 줘서 꽉꽉 목표들을 세우고 정작 그걸 하느라 소중한 시간들을 놓쳐야만 한다면 그냥 좀 허술하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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