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생에 첫 5성급 호텔 입성은 기대 반 긴장 반이었다.
왠지 모를 심리적인 문턱이 높아만 보였으니까. 도착해보니 입구부터 으리으리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내 키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아주 높은 천장과 번쩍번쩍하는 샹들리에가 로비서부터 우리를 반겨주었다.
돈은 내가 내는데도 왜 이리 체크인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신기해하며 올라간 방안은 생각보다 넓고 탁 트여있는 풍경이 너무 근사했다. 앞으로 보이는 새파란 수영장도, 호텔 곳곳에 높인 나무들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짐을 풀고 근처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도 역시나 비건 레스토랑에 다녀오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영어 회화들을 들으며 밥을 먹는데 정말 이국적인 체험이었다.
학창 시절의 듣기 평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정신없는 와중에도 배가 고파 허겁지겁 감자 뇨끼와 미나리 파스타, 노루 궁둥이 버섯 치킨을 흡입했다. 멀리까지 나온 것이 아주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야경 맛집이라는 소리를 듣고 올라온 숙소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앞 쪽에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하늘과 까만 동네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이곳은 야경이 30만 원어치를 한다고. 막상 와보니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와인과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딱 좋겠지만 실상은 무알콜 맥주와 비건 감자칩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완벽했다. 다음 날 아침 전까지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큰 마음을 먹고 간 5성급 호텔에서 이런 일을 겪을 줄이야.
실은 외국계 호텔이기에 조금 기대를 했었다. 비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도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서양식으로 샐러드라도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서 참여했던 캠프에서 갔던 비즈니스호텔에서도 먹을 게 있었는데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흔한 김밥 하나 없을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냈는데 아침부터 굶게 되다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외국계열의 호텔답게 어디서 구경도 못해본 치즈들의 향연이었다. 이쪽에서부터 저쪽까지 쫙 펼쳐진 베이커리와 형형색색의 하몬들을 보며 여기도 내가 먹을 것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흰 밥에 구운 야채들만 연신 가져와서 밥을 먹었다. 그나마 기대했던 버섯볶음도 역시 버터에 볶아져 있어서 결국 제대로 먹은 건 흰 밥과 된장국, 두부 몇 개와 샐러드 한 접시뿐이었다.
한 번은 동생이 서울로 놀러 오게 되었다. 우리는 좋은 숙소를 다 제쳐두고 비건 음식점이 있는 인사동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후미진 골목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에 묵게 된 것이다. 정말 호텔이라고 이름만 붙어있는 그런 숙소였다.
그래도 깨끗한 시설에 만족하며 근처에 유명한 ‘마루 자연식 김밥’에 가서 이것저것 포장해서 돌아왔다. 비건 1세대의 분식점이랄까. 떡볶이, 김밥, 라면, 오뎅, 군만두와 양념 콩강정까지 쫙 펼쳐놓으니 쫄쫄 굶었던 호텔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였다.
동생도 채식을 지향하고 있기도 하고 나와 있을 때는 주로 비건식을 먹기에 정말 좋은 선택지였다. 흔한 야경 하나 없는 숙소였지만 먹는 것이 충족되니까 포근하고 아늑한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침으론 조식 대신에 근처에서 죽을 시켜먹었다. 육수 없이 물에 끓인 야채죽에 동치미라니 아주 환상적인 궁합에 감탄하며 만족스럽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먹는 것이 생각보다 여행의 질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그것이 곧 삶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기도 하고 말이다. 의식주의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정말 기본적인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걸 실감했다.
5성급 호텔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전문가들의 기준에 의한 5성급, 그런데 나는 타인의 이야기에 너무 귀 기울이지 않았나. 그게 나에게 맞는 기준은 아닐 수도 있는데 그걸 너무 맹목적으로 믿고 살아오지 않았나 돌아본다.
근사한 야경보다 으리으리한 시설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숙소 그리고 내 입맛에 맞는 밥집이 근처에 있는 것이 더 행복했었다. 가까이에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원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고 근처에 고궁이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한적하게 산책을 할 수 있으니 나에게 5성급이란 이런 곳이지 않을까.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맛집보다 한적하고 깔끔한 동네 한 구석의 분식집이 내게 더 좋은 선택지였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된다. 앞으로도 나의 취향의 것들을 더 알아가야만 삶이 행복해질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이미 지나온 사춘기며 오춘기를 뒤늦게 겪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더욱더 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낡은 것들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간다. 과거처럼 스톱워치에 찍힌 공부시간과 싸워가며 억지로 책상 앞자리를 버텨내던 나는 이제 없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렇게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시는 못해볼 경험들을 해봤으니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기에 말이다.
어설프고 평범의 기준을 벗어난 나도 이제는 나의 세상에서 그저 나에게 맞게 살아보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