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부터 지금의 막달에 오기까지
여러 번의 병원방문이 있었다.
남편은 회사 때문에 쉽지 않았을 텐데
한두 번 빼고 늘 같이 동행해 주었다.
병원만 가면 긴장하는 나의 트라우마 때문에
손에 땀을 닦아주거나 손을 잡아주고
"오늘도 괜찮을 거야." 위로하며
묵묵히 내 옆을, 얼렁뚱땅을 지켜주었다.
12주 정밀초음파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같이 병원을 찾았다.
이때쯤 아이를 잃어서인지
긴장감과 적막감을 가득 안은채
초음파실로 향했다.
쌍둥이라 1시간 가까이
그 좁은 초음파실에서 선생님, 남편, 나
셋이서 숨죽이며 정밀초음파를 보았다.
초음파 화면을 보는 내내
꼬물꼬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아가들 보면서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울렁거리던지_
다행히도 얼렁 뚱땅이 모두 심장이
우렁차게 뛰었고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웃을 수 있었다.
초음파를 다 보고 일어서는데
남편과 눈이 마주쳤고
마주통한 두 눈에 눈시울이 적셔있었다.
우린 서로 찡긋 웃었고
찰나의 순간 그렇게 서로를 보듬었다.
검사를 통해 아가들이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고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바로 알리지 못했다.
시어머니만 태몽을 꾸셔서 대략 눈치채고 계셨다.
쌍둥이인지는 모르신 채.
쌍둥이는 안정기가 없어 조금 더 천천히
알리기로 했다.
맘 편히 알리고 축하받고
임신을 마냥 즐기면 좋겠지만
유산경험이 있으니 모든 것을
조심하게 되었다.
혹시나 같은 일이 또 반복되면
위로를 받는 것도 힘들지만
하기 힘든 위로를 전하는 것도,
가족들 특히 내 엄마가 속상해할 것을
알기에 서두를 것이 없었다.
12주 아이를 잃었을 때
2박 3일 동안 입원을 했었다.
엄마가 오겠다고 했지만 오면 나도 마음이
더 약해지고 아기울음소리 가득한 곳에
아이를 보내고 덩그러니 놓인 내 모습을
보는 엄마 마음이 어떨지 알기에
남편과 나 둘이서만 아픔을 오롯이 이겨냈다.
촉진제를 맞으며 유도분만을 진행했지만
24시간이 넘어도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기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나 보다.
미안해 아가. 갈 때마저 편히 못 보내줬구나.
의사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술을 감행했다.
전신마취.
깨어나면 난 늘 허전해진 배를
붙잡고 울고 있었던 아픈 기억_
그래서 전신마취가 참 싫다.
하루 더 입원하고
엄마집에 몸조리하러 들렀다.
엄마가 나를 보고 제일 먼저 건넨 말
"고생했어, 우리 딸."
엄마가 남편을 보고 제일 먼저 건넨 말
"미안하네, 자네.."
집으로 컴백하고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던 중
남편이 잠자리에서
자기는 그 말이 기억에 남아 마음 아프다며_
"미안하네, 자네.."
남편이 잠든 후 펑펑 울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사위를 보자마자 한말이 미안하다인지..
알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마 마음.
몇 글자로 그 마음을 담아낼 수 없기에_
부모님께는 16주쯤
친구에겐 19쯤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아하셨고
쌍둥이라 더 좋아하셨다.
친구들도 만나서 얘기를 전했고
세 명이 모두 동시에 눈물이 팡 터졌다.
묵묵히 소식을 기다려준 나의 친구들.
누군가는 어려움 없이 아이를 갖고 또 낳고,
누군가는 어렵게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이
서로에게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노력들을 들춰내지 않고
좋은 소식을 묵묵히 기다려준
나의 친구들이 고맙다.
소식을 전한 후 얼마뒤 다시 만난
친구 손에는 쌍둥이 내복이 들려 있었다.
상자 속에 똑같은 내복이 나란히_
순간 눈물이 찡.
결혼 5년 후 처음 본 나의 아가옷이라니.
어찌나 아기자기하고 작던지.
집에 와서 중간중간 꺼내볼 때마다
뭉클 또 뭉클_
나의 첫 아가옷에 그렇게 감동받던 날.
누군가에겐 보통의 일들이
나에겐 감동의 일로 다가와
위로해주곤 했다.
작디작은 나의 첫 아가옷으로
내 뱃속에 정말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구나 새삼 느낀 날_
기다렸던 소식을 듣고 같이 울어준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했던 날_
늘 나와 얼렁 뚱땅이를
지켜주는 남편의 존재로
매 순간마다 행복한 나_
임신 후 사소한 것에도 눈물이 나곤 했는데
확실한 건 호르몬 때문이 아닌
감사와 행복의 눈물이라는 것.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