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립 Jul 07. 2023

27. 인디게임을 만들다

2017년 6월, 브뤼셀


마치 신들의 세상을 경험하고 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처럼,

누구에게 말해줘도 실감하지 못할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브뤼셀의 텅 빈 집에 혼자 도착했을 때, 처음 들었던 감정은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면 24시간 편의점이 있을 것 같은, 아직도 그때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와 정신없이 서울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전시를 준비하던 몸의 흥분감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 5개월의 시간들이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시 돌아온 브뤼셀은 공허했다.


예전과 달라진 상황들 속에서 나는 점점 브뤼셀에서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밖에 외출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매일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 좁고 좁은 브뤼셀 사회에서 더 복잡한 일에 얽매이기 싫었던 나는 계속 더 동굴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매일이 버팀의 연속이었고, 그러면서 내 정신상태뿐만이 아니라 하루하루 일상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졸업은 해야 했다. 나는 석사 과정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동시에 내 브랜드의 차기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했다.


학교수업, 석사논문, 디자인 외주, (한국에서 인연이 된 주얼리 브랜드와 계속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브랜드 프로젝트까지. 나는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불가능해 보이는 이 4가지 일을 동시에 강행해 보기로 결정했다. 유럽학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입학보다 어려운 게 졸업이기 때문에, 졸업시험과 논문을 2년으로 늘려 넉넉하게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난 더 이상 브뤼셀에 오래 남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몸이 힘들더라도 최대한 빠른 시간에 끝내고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를 바쁘게 만드는 것만이 괴로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이 4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내가 찾아낸 해결책은 '작업 논문'이라는 카드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를 써야 하는 논문을, 그 주제와 연결되는 작업물로 분할시켜 글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작년에 그렇게 논문을 발표한 윗학년의 케이스를 본 적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교수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을 내 브랜드의 차기 프로젝트로 연결시켰다. 다행히 도시를 주제로 한 내 브랜드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수들과 여러 피드백을 거치며 그 안에 담겨있는 철학과 텍스트적인 레퍼런스가 꽤나 탄탄했고, 많은 서적들과 이론들을 참고했기 때문에 논문의 주제로 삼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두 가지 일을 적어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었다.


논문의 주제를 잡고, 지도 교수를 결정한 후 디테일한 내용들을 논의하는 동시에, 한국에 있는 재영이와 매일 통화하며 브랜드 프로젝트에 대한 방향 또한 맞춰나갔다. 많은 회의를 거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오고 간 끝에, 우리는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게임이라니. 뜬금없게 느껴지겠지만, 전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조금 더 몰입감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왔고, 도시라는 시스템과 그 안에 담겨있는 담론들을 어렵지 않게,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기에는 게임이라는 방식이 가장 제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 둘 다 한 번도 게임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코딩을 할 줄도 몰랐다.


서로 '이게 과연 정말 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 도전적인 결정이었지만 우리는 과감했고, 막연한 리스크보다는 더 선명한 설렘이 앞섰다. 재영이는 바로 개발자와 자금을 구하는데 착수했고, (사실상 이 둘이 없으면 프로젝트는 불가능했다) 나는 게임의 메시지와 테마,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만드는 데 있어 당연히 재미가 1순위겠지만, 동시에 졸업논문으로 발표할 작업이기 때문에 그 안에 담겨야 할 철학적 깊이도 놓쳐서는 안 됐다. 이 두 가지 방향에서 밸런스를 잡는 게 나에게는 가장 큰 챌린지였다.


다행히도 여러 가지 인디게임 레퍼런스를 찾아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다룬 독특한 방식의 게임도 많았다. 이게 게임인지, 현대 미디어 아트인지, 정체성을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더 재미있는 논란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도 이런 독특한 인디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단순히 유희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체험, 도시에서의 삶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만드는 메시지. 그렇게 게임의 뼈대를 조금씩 기획해 나갔다.


그러는 동시에 재영이는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당시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관련 일을 하고 있었던 재영이는 펀딩에 관해 꽤 배경지식이 있는 편이었고, 전문가의 멘토링까지 받아가며 전략을 세워나갔다. 재영이가 잡아 놓은 전략 방향에 맞춰 나는 데모 트레일러 영상과 게임 스크린샷, 시놉시스 등을 이미지로 작업해 나갔고, 리워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품들로 어렵지 않게 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디테일을 맞추어 가며 서툴지만 야심 찬 게임 펀딩 프로젝트를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3월이 되었다. 뉴스에서는 법원이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다는 소식으로 온통 떠들썩했다.

봄이 오고 있었고, 나는 펀딩 프로젝트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홍보를 하는 동시에, 교수들에게 작업의 진행상황을 보여주며 논문도 써나갔다. 동시에 시간을 쪼개어 웹디자인 외주 일도 계속 이어나갔고, 곧 있을 졸업시험들도 준비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하나씩 진행이 되어가고, 비록 외로운 시간들이었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만으로 매일매일을 버텨가며 어느덧 6월, 그동안 준비한 모든 것의 평가를 받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게임 초반 부분의 데모 버전과 논문이 완성되었을 무렵, 우리가 공개한 펀딩은 최종적으로 275%의 모금을 달성했고, 개발자까지 합류하며 게임 프로젝트 항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Urbanoiz 유튜브 채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