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es
나는 지금 작은 홍차 가게를 준비하고 있다. 차는 만들어져 있는 제품을 사 오면 되고, 테이블이랑 각종 인테리어는 미술을 전공한 여동생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찻잔 준비에 신경을 써야 한다. 홍차에 대한 내용은 늘 관심 있게 봐 오던 것이어서 마음이 덜 쓰이는데, 찻잔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백화점에 가서 세일 제품을 골랐는데도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아울렛과 서울 경기권에 있는 엔틱판매점을 찾아다녔다. 마찬가지로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엔틱과 빈티지 물건을 경매하는 곳을 알게 되었다. 신세계였다. 가격도 훨씬 싸고 아주 다양한 물건을 고를 수가 있었으며, 그 물건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눈알이 빠져라 들여다보며 물건하나하나를 고르고 있었다. 그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찻잔 하나가 있었다. 바로 '에르메스' 찻잔이었다. 에르메스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고급 브랜드다. 쉽게 손에 쥘 수 없는 고가의 브랜드 중 하나가 아닌가. '티에리 에르메스'가 파리에서 설립한 프랑스의 패션과 가죽기업이라고 알고 있는데, 찻잔도 있다니 갑자기 궁금했다. 경매인이 설명하기를, 1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찻잔이라 잔이 유난히 크다고 했고, 에르메스 회사에서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도자기 회사에 따로 주문해서 기념일 때마다 하나씩 만든다고 했다.
연한 푸른빛의 바탕에 분홍빛을 한 띠 모양의 무늬에, 적당히 옴폭한 소서(받침) 위에 안정감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이 당당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나는 경쟁에 참여하여 30만 원에 낙찰을 받았다. 이틀을 기다려 택배 박스를 열었다. 손이 떨리고 기대에 부풀어 내 몸속에 바람이 가득 들어있는 풍선 하나를 품고 있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몇 겹의 포장지를 풀었다. 파손되지 않도록 싸고 또 싸서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렇게 겨우 내 손바닥 위에 내려 앉혀 놓았다. 푸른빛이 장엄한 그리고 아주 큰 사발만 한 찻잔이 나의 두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첫 만남의 느낌은 멋지다는 생각보다 '너무 크다'라는 것이었다. 진짜 너무 컸다.
차를 마시기엔 좀 그렇고 라면을 끓여서 담아보았다. 딱 맞았다. 찻잔에 차만 담으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라는 합리화 아래, 나는 30만 원짜리 그릇에 650원짜리 라면을 담아 먹었다. 맛있다는 생각보다 오늘의 이 장면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다.
1백만 원이 넘는 가격의 찻잔도 많다. 화려하고 멋지다. 그렇다고 저렴한 찻잔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취향에 맞는 찻잔을 찾게 되면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상처가 있다 해도 그 제품을 구매한다. 남들이 볼 때는 깨진 찻잔도 돈을 주고 사냐고 하겠지만 그 찻잔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백 년 세월의 풍파를 가득 담고 있다. 거기다 나의 이야기를 더 보태려고 한다. 엔틱 찻잔과 그릇들을 구매하는 것은 단순히 그릇을 사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세월을 사는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차를 내려서 찻잔에 따르고,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본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건 차맛뿐 아니라, 지나간 백 년의 세월이다. 세월을 거슬러 아주 오래전 상상속의 나를 만들어 차를 마셔본다. 이제 지금부터는 나의 소소한 삶을 내 작은 찻잔에 담아볼 생각이다.
에르메스 잔에 담긴 라면
'빙엔그뢴달' 에스프레소잔은 내가 최고로 아끼는 잔이며 뚜껑이 있다. 세계 3대 도자기 회사 중 하나인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이 빙엔그뢴달을 인수하여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운 단종된 제품이다.
요즘 생산되는 로얄코펜하겐은 태국에서 대부분 만들어지고 있지만, 위 사진의 코펜 제품은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빙엔그뢴달과는 무늬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