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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 May 27. 2024

그를 파헤쳐 보았더니.

땅속의 세상 같았다.

  마당에 있는 텃밭을 호미로 파보면, 여기서는 지렁이가 나오고 저기서는 개미집이 보이고, 또 어떤 곳에서는 두더지 굴도 발견된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보드라운 흙만 보여주기도 한다. 흙속에 내가 원하는 영양가 많은 흙만 있을 수 없듯이 사람이 사는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와 35년간 살면서 힘들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았다. 내 안에 있던 그와의 갈등을 들여다보니 땅속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두 발을 딛고 있는, 그저 인간세상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영양가 많은 흙만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면 돌도 골라내고 퇴비도 듬뿍 주면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꽃과 나무를 심을 때 식물이 가진 기질에 따라 흙도 바람도 햇빛의 양도 물의 양도 달라진다. 붉은 수국을 심었는데 보라색 수국꽃이 핀다. 분홍찔레가 하도 예뻐서 옮겨 심었더니 하얀색 찔레가 폈다. 그도 나도 한 가정을 만들면서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지우고 새로운 색을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혼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도 나도 몰랐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다.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어 빛과 바람과 물을 주고 가지도 잘라주며 적절하게 퇴비도 줘야 하는데, 마른땅에 물만 퍼부어댄 꼴이 되었다. 왜 스스로 자라지 못하는지 서로 탓하며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되면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는 그런 나를 경멸했고,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오늘, 서로에게 상처만 남았다.


  그는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에게 아픔을 가져다준 가해자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태어나보니 가난의 구덩이 속에 있었다. 도시에서 자라서 빈부의 격차를 고스란히 몸으로 떠안고 살아야만 했다. 형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녔고 지금도 형에게 진 빚으로 인해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돈으로도 마음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갚아지지 않는 것이 대학등록금을 빚진 것이다. 요즘은 국가에서 학비대출을 해 주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고 그렇다면 대학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는 어쩌다 대학의 문턱을 밟아버렸다. 그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를 내 옆에 둘 생각이다. 땅속세상처럼 인간세상도 별반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렁이가 살아 숨 쉬고 두더지가 움을 파고 살아가고 있고, 개미도 저들의 집을 지어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임을 오늘 이 시간 가슴에 새겨본다.

이전 09화 그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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