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록하며 살기
시험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시험 전날, 밤을 새우며 책을 외우고 잠들기를 반복했던 새벽 기운이다. 잠을 이기면 해가 뜰 때까지 공부한 자신이 뿌듯했고, 잠에서 지면 해가 뜬 걸 확인하고 자신을 다독이며 서둘러 학교에 갔던 것 같다.
석사 과정 때는 시험보다 과제 형식이 더 많았다. 팀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팀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팀 활동에 익숙해지면서 프로젝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박사 과정의 첫 학기 첫 중간고사는 시험이었다. 당연히 과제 형식일 줄 알았지만, 시험이었다. 교수님께서 덧붙이셨다. "이번 시험은 오픈북으로 진행합니다."
오픈북은 사실 답이 책에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고나 할까.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해도 되고, 종이에 펜으로 적어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종이에 펜을 선택했다.
시험 당일, 종이에 펜을 선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단 두 명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한된 한 시간 동안 두 개의 문제에 대해 답을 적는 시험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린이의 작품을 보고,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로웬펠드의 이론을 기반으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어린이의 작품에서 로웬펠드의 발달적 특성을 발견하는 건 매우 흥미롭다.
난화기, 전도식기, 도식기, 또래집단기의 각 단계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나만의 시각을 마음속에정리해 놓았었다.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아야 할지, 어떤 순서로 봐야 할지의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인물, 공간, 색채,주제 등의 순서로 작품을 세분화하여 바라볼 준비를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첫 번째 문제를 보고 어린이의 발달단계를 파악하고 작품 속 특징을 수월하게 서술할 수 있었다.
다만, 생각하지 못한 점은 손이 너무 아팠다는 점이다. 최근에 손에 필기구를 쥐고 글을 써 본 적이 있었는가? 초안을 적은 후, 다시 옮겨서 적는 방법으로 하니 30분 동안 쉬지 않고 빼곡히 쓰느라 손이 너무 아팠다.
'아! 이래서 다들 노트북을 준비했구나.'라는 이미 늦은 선택에 대해 후회할 시간도 없이 글을 써 내려가기에 바빴다. 그래도 무엇을 쓸지 몰라서 고민하는 것보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며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것이 더 나은 것 같기는 하다.
두 번째 문제에는 처음 본 작품 사진이 있었다. 그 작품사진을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을 경험과 관련지어 서술하는 것이다. 사실 정확히는 문제의 문장이 기억 안 난다. 단지 내가 느낀 뉘앙스로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미적 인식, 미술 감상, 미술 비평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두 번째 문제도 첫 번째 문제처럼 다시 옮겨서 적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냥 바로 시험지에 적어야 했다. 사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주목한 첫 부분은 그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서로 엇갈리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보고 '관계의 단절'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현대사회에서의 관계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같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서로 마주 보는 시선이 아니라고 단절이라는 부정적 키워드가 떠올랐을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시선에 많은 영향을 받는사람인 것 같다. 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나의 경험이나 가치관으로 인해 작품 속에서도 그 부분이 제일 먼저 발견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듀이가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지적한 것처럼, 비평의 목적은 미술작품의 지각에 대한 재교육이다.우리가 해석적 진술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그런 진술이 작품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나라는 사람이 작품에 들어가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미 그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나의 경험들이 바탕이 된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시간 동안 빼곡히 작성한 중간고사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오며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글로 드러낸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 그림에 대한 글을 같이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림만으로 담아내지 못한 넘치는 생각들을 남기고 싶었던것 같다. 브런치에 <미술교육을 배우는 나의 에세이일뿐>을 연재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느낀 생각과 감정들을 글로 정리해놓고 싶은 마음, 그런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글로 남기지 않았으면 흩어져버렸을 생각들이 이렇게 브런치에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10화 중에 7화를 쓰고 있으니 뿌듯하다.
석사 과정 때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서비스전공 수업이 아니었는데,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아 타전공과목을 듣게 되었다. 매주 자신만의 작품을 작업하며 교수님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이 수업이 일러스트 작품 활동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수님께서 주시는 따뜻한 격려도 좋았지만, 참고하라고 넌지시 말해주시는 피드백이 너무 소중했다. 과제 결과물로 한 학기 동안 그렸던 작품을 그 작품에 대한 글과 함께 엮어 에세이 책자를 만들었다. 만약 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나 생각들을 오롯이 내가 간직할 수 있었을까. 기록의 중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10년 후에, 그때는 내가 박사 과정을 무사히 마쳤기를 바라며, 어쨌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그때의 내가 지금의 글을 마주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적어두길 잘했다.'라고.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은 흐려지기에 살아가는 나를기록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