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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건 Jul 20. 2022

우울증 민간요법

4일 차.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네 가지 방법

이 '우울증 민간요법'에 앞서 '우울증 응급처치법'을 먼저 시행하기를 권한다.

내가 응급처치법과 민간요법을 구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응급처치법은 분명한 의료적 기능이 있으며 효력이 있다.

그러나 민간요법은 의료적 효능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아래에 적을 네 가지 방법은 상담이나 약물 복용 등 의료적인 기능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내가 자해충동 및 자살사고가 들 때에 도움이 되었던 일들이다.

정신과에 내원하여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우울감이 심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에도 아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우울감을 해소하였다.


'내가' 직접 해 보고, '내가' 효과를 봤던 방법들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완벽히 똑같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민간요법의 성질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이해주기를 바란다.


실천하기 쉬운 방법 순으로 적어보겠다.


1. 산책

산책을 하려면 밖에 나가야 한다. 밖에 나가면 '집 안' 또는 '방 안'과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적이 드문 곳에는 바람소리가 있다. 요즘 같은 때에는 풀벌레 울음이 한창이다.

봐. 벌써 '안'에 꽉 들어차 있던 생각과 우울함이 '밖'에서 흩어졌다.


물론 산책을 나간다고 해서 고민이나 고통의 원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에서 하던 고민 중 몇 가지는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동안 만들어진 고민임을 깨닫고 버릴 수 있다.


산책이라고 적었지만 꼭 걸으라는 것은 아니다. 뛰어도 좋고, 그네를 타도 좋다. 핵심은 내 생각이 계속 정지해 있는 '안'에서 나와, 끊임없는 변화가 있는 '밖'에서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털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친구가 게 해주었던 실험이 있다. 당신도 지금 참여해 보자. 큰따옴표 속 지시를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만 생각해 봐."


그만 생각해, 그만 생각해? 그만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고개를 흔들어 봐."


고개를 흔드는 순간 목을 돌리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그만 생각하려던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만 생각하려면 '그만 생각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안 돼. 몸을 움직여야지."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우울증 민간요법' 중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특히 해가 있을 때 걸으면 좋다. 일광욕이 우울증과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흔한 지식이다.


2. 글쓰기 혹은 그림 그리기

가만히 누워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면 생각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감정은 거대해지다가 '걱정'으로 변한다. 그렇게 고민해야 할 지점들은 잊히고 걱정만이 남는다.


그런데 글쓰기 또는 그림 그리기를 하다 보면 그 걱정들은 작은 종이 안에 가둬진다. 뭐야. 이렇게 손바닥 하나짜리, 작은 거였어? 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 민간요법'에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핵심은 내 걱정을 종이 위에 실체화시키며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을 문장이나 그림으로 정확히 표현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늘 아침에는 폭우가 왔어. 그런데도 매미가 울더라. 맴맴 소리는 어떻게 폭우에도 묻히지 않는 걸까? 이런 간단한 일상이라도 글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렸던 그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내가 나중에 살고 싶은 방의 모습이었다. 창으로 햇빛과 바람이 많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검은 볼펜으로 휘갈기기만 했지만 개운한 곳이었다.

그때 그린 그림. 제목은 내 방. 냉장고와 옷장, 침대가 있다.

생각이 지나치게 부풀어 오를 때 노트를 펼쳐라. 아무거나 그리고 써라. 마구잡이로 그린 일지라도 그리고 나면 몸이 좀 가벼워진다.  크기만큼의 걱정이 머릿속에서 종이로 빠져나가서 그렇다.


노트 추천을 하자면 B6 사이즈 정도가 들고 다니기도 좋고 멋진 디자인도 많다.

글과 그림을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그림일기 노트를 추천한다. 내지 디자인도 풋풋해서 좋다. 새 학기를 맞은 듯한 기분도 들어 어쩐지 설레고 재미있다.


중요한 건 잘 그릴 필요도 잘 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쓰고, 그려서, 걱정을 종이 위에 던져 버려라. 종이는 사람보다 인내심이 강하니까*.


3. 비슷한 고통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하지만 '우울증 민간요법'에 있어 사람들과의 대화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나와 비슷한 고통을 가진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만 우울감이나 감정의 동요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님을,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일종의 집단상담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뗏목 위에서 홀로 표류하다가 구명정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식수도 있고 비스킷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있다. 표류하는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털어놓을 수 있다. 그 사람들도 각각의 뗏목에서 표류하다가 구조된 사람들이라 당신의 괴로움을 알고 있다. 어제 갓 말을 배운 사람처럼 마구 말한다. 내가 아버지에게 목이 졸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말했다.


"너무너무 무서웠겠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감정이 둔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그저 짜증 나고 역겨웠던 사건 정도로만 회상했다. 친구가 '무서웠겠다'라고 말했을 때에야 나는 내가 아버지에게 목 졸린 일을 무서워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의 말을 통해, 사건이 벌어졌던 그 시간 그때 나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렇듯 비슷한 고통을 겪은 친구와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만약 고통을 나눌 친구가 없다고 느낀다면 정신건강복지센터에 가보자.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기가 있으므로 참여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 취미생활 하기

이것을 4번,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우울증 민간요법'으로 둔 이유는 취미 갖기부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취미생활을 하려면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돈과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취미생활을 할 여유가 된다면 평소 조금이라도 관심 있던 '쓸데없는 일'을  해 보자. 앞서 말한 글쓰기, 그림 그리기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겠다. 노래 듣기, 춤추기, 철봉 돌기. 요즘은 수예가 유행이니 뜨개질이나 십자수 도전해보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면 유튜브에 '취미 추천'이라고 검색해 보자. 여러 추천 영상이 뜨는데 자기 계발 관련 취미 영상은 권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 자체가 목표고, 그것이 자기 계발이니까 말이다.


실천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지만 일단 취미를 갖기만 한다면 취미생활은 가장 효과 있는 '우울증 민간요법'으로 활약할 수 있다. 취미가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 더 재밌어지고 하루하루 버티는 게 더 쉬워진다.


예를 들어 당신이 웹툰을 보는 취미를 갖게 됐다고 하자. 그럼 당신은 다음 연재일을 기다릴 거고, 다음 연재일이 가까워 올 수록 설렐 것이다. 취미는  즐겁고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취미생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과적으로 세상 모든 것에 조금씩 흥미를 가진 '인간 멀티플렉스'가 되고 말았다. 상당히 지출이 뼈아프지만, 나는 이제 내일이 기다려진다. 다음 주에 발매되는 노래와 다음 달에 나올 인형이 기다려진다.

내게 삶을 이어나갈 의지를 주고, 이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에 애착을 갖 하며 우울감을 잊게 해 준 것이 취미생활이었다.


위에 소개한 방법들 말고도 당신이 시도했을 때 우울감이 해소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의 '우울증 민간요법' 노트에 적어놓으면 좋겠다. 우울의 바다에 파도가 심하게 칠 때마다 '우울증 민간요법'을 실천하여 피신하자.


물론 당신의 의지만으로 파도에서 완전히 안전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의지로 우울증 치료가 가능했다면 나도 제목에 '표류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표류라는 것은 의지가 개입된 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표류 중인 뗏목의 주인이다. 우리는 이 뗏목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우울증 민간요법'은 '우울의 바다를 표류하는 뗏목의 보수법'이기도 하다.

산책을 하며 생각 방식을 고치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통해 걱정을 정돈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웃거나 울며 감정을 달래고, 취미생활을 하며 세상에 애착을 가진다. 그렇게 우울의 파도에 더더욱 잘 대처할 수 있는 뗏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실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책을 나가다 보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얘기를 하다 보면, 취미에 시간을 쓰고 있다 보면 어느새 뗏목이 아니라 배 안에서 표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만 골라 지금 시작해 보자. 지금 신발을 신어보자. 그리고 밖에 나가서 숨을 쉬어보자.


당신이 멋진 돛을 단 배 한 척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안네의 일기, 1942년 6월 20일 토요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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