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꽃이 지고 나면 빨간 꽃이 보인다.

벚꽃은 하얀 꽃만 예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봄이 되면 길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얀 꽃이 가득 피는 벚꽃길이 있다. 나는 이 길의 나무가 해마다 굵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는 재미에 매해 겨울이 되면 봄을 한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벚꽃은 그야말로 너무 짧게 피어서 봄비가 빨리 내리기라도 하면 이제부터 더욱 예뻐질 꽃들은 다 내려 앉아 버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땅에 가득한 꽃잎 덕에 꽃길을 걷는 기분으로 걷는다. 그래도 곧 끝나버릴 꽃구경이 너무나 아쉬워서 봄비가 너무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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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벚꽃시즌이 짧았다. 긴긴 겨울동안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온 봄이 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벚꽃이 활짝 피어주길 기다렸다. 코로나시즌도 겹쳤지만, 사람이 많은 곳으로 멀리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이 벚꽃길의 만개를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못 보고 이틀 연달아 내린 봄비에 꽃들은 전부 없어져 버렸다.


없어져 버렸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마음이 참 많이 무너졌던 것 같다. 그만큼 나의 마음이 많이 다쳤던 것일까.. 갑자기 바뀐 일터와 함께 바뀐 동료들… 그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힘겨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꽃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도 빨리 져버린 꽃들이 아쉬웠고, 그 꽃들을 없애버린 봄비가 야속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얀 꽃이 앉았던 자리에 빨간 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여리여리했던 하얀 꽃에 비해 튼튼해 보이고 단단해 보이는 빨간 꽃이…. 이건 뭘까… 너무나 귀엽고 예뻤다. 하얀 꽃만 있었을 때보다 초록색 이파리들과 어우러진 작고 귀여운 빨간 꽃은 원래 벚나무가 아니었던 것처럼 전혀 다른 나무가 되어있었다.


그 나무에 다가가 자세히 봤더니 내가 생각한 빨간 꽃은 하얀 꽃의 꽃받침이었다. 하얀 꽃이 떨어지고 빨간 꽃받침이 남아있는 것이다. 초록색 이파리들과 어우러진 빨간 꽃받침은 벛꽃이 가득 피워졌던 길보다 좀더 다부지게 보였고, 예뻐보였다. 왜 나는 작년까지 이렇게 예쁜 길을 그저 안타깝게만 봤을까.. 이렇게 아름다운데…

작년까지만 해도 하얀 벚꽃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이 길이 너무 쓸쓸하게만 보였다. 화려함을 잃은 그저 초록색인 칙칙한 나무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뭐 때문에 이렇게 달라보였을까.


나는 그 모습이 우리 인생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나의 아름다운 하얀 꽃이 다 떨어진 모습을 안타깝게만 보면서 남아있는 예쁜 빨간 꽃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직 나에게 예쁜 부분이 남아있는데..나는 나의 아름다움이 끝났다며 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분명 하얀 벚꽃은 화려하고 예쁘다. 하지만 금방 져버리는 하얀 꽃들보다 버찌를 열어낼 빨간 꽃받침과 초록색 이파리들은 여름내내 싱그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그늘과 시원함을 준다.


나도 아마도 아름다웠을 화려하고 젊은 시절은 갔지만 그보다 더 단단하고, 오래도록 나를 밝혀줄 초록색 이파리들이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오늘도 열심히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삶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매일 이렇게 주변의 작은 것에서 동기부여를 받으며 살아간다면 분명 아름답게 보이는 날도 오겠지…비록 그 날이 오늘이 아니라더라도 내가 올해의 꽃이 진 벚나무를 아름답게 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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