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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Aug 28. 2023

운전기사들의 세계

#02. G90을 타는 운전기사

새벽 5시 30분.

여름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4월의 새벽은 한밤중인 뜻 깜깜하다. 어떤 사람일까?, 먼저 일한 선배에게 성품이 좋다고는 들었지만 전담 운전기사를 해본 적 없는 제이는 긴장감에 몸의 이곳저곳이 부자연스럽다. 10분 미리 도착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갑질 대기업 임원을 비롯하여 레전드 대사를 남긴 영화 주인공까지 떠오른다. 곧이어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이 불길한 생각의 흐름을 끈어낸다.


덜컹. 차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안녕하세요."


매너 좋은 느낌을 풍기며 보조석 뒷자리에 자리한 그는 가볍게 첫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인상이 나쁘진 않군.' 제이는 다소 안심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엑셀을 밝아 부드럽게 차를 길 위로 밀어냈다. 긴장했던 첫인사의 관문을 끝내니 임원은 그 이후로 도착하기까지 1시간 30분가량 광장에 서 있는 동상처럼 한마디 말이 없다. 임원은 입을 꾹 닫고 그 만의 세계로 들어간 듯하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집중하기도 하고,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아보기도 한다. 조금 더 지내보니 그는 화, 목요일에는 그 시간에 전화영어를 하기도 하고, 술 약속을 가진 다음날에는 1시간 30분 내리 자기도 했다. 동상이 된 임원에게 더 이상 긴장을 쏟을 필요가 없어진 제이는 자연스레 자신이 움직이는 차에 자신의 감각기관을 집중한다.


지금 액셀을 밟고 있는 차는 현대차의 최고급 모델 '제네시스 G90'. 캄캄한 밤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먹잇감을 향해 소리 없이 근접하는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검은색 'G90'은 엠블럼 만을 반짝이며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국내차로는 최고의 승차감과 하차감을 자랑할 만할 차다. 우선 제왕 같은 겉모습에 감탄한 제이는 운전을 하며 더욱더 'G90'에 매료된다. 독일의 여러 차도 타 봤지만 승차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방지 턱을 만나도 적당히 속도만 줄여주면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좋은 차의 느낌은 이런 것이군, 제이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한쪽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의 배달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이 일을 만나기 전까지 밤에는 그 오토바이로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음식을 날랐다. 근래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조금씩 쌓이고 있는 그 오토바이. 제이에게 얼마간의 숨통을 틔워준 고마운 녀석이다. 이제 그 숨통을 이 최고급 'G90'이 틔워주고 있으니 참으로 드라마틱한 교통수단의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제이가 제일 먼저 말을 튼 사람은 '시카고'였다.  


"어디 있다 오셨어요? 몇 년 차세요?"


머리칼을 5대 5로 힘겹게 가른 그의 첫 말이었다. 웨이브를 넣은 그의 곱슬머리는 통통한 볼 살에 어딘지 모르게 썩 잘 어울려 보였다. 만약 머리칼이 짧았다면 험악해 보였을 그의 인상을 다소 귀엽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다행이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는 루이뷔통 로고가 현란하게 프린팅 되어 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고 그 패턴이 너무 현란한 나머지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있는데도 자꾸 그의 신발이 보였다. 


곱슬머리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제이와 나는 그 이후로 그를 ‘시카고’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부유했던 시카고는 외국유학파로 자신의 부유했던 시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한국문화를 잘 모른다는 것을 성실하게 드러냈고 자신이 해외파임을 사람들이 잊기라도 할까 봐 꾸준히 그 부분을 어필했다. 그는 정말 한국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인지 말을 할 때면 할 수 있는 대로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어학원의 원어민 선생님처럼 강조할 부분의 발음에 주의하며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손동작까지 동원하여 특유의 느끼함을 배가시켜 말을 하곤 했다. 듣고 있자면 귀에 버터를 발라대는 것 같은 미끌거림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훔치기도 하고 비누로 귓바퀴를 닦고 싶은 느낌을 자주 느꼈다. 누구보다도 토종 한국인처럼 보이는 그는 이미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이곳이 남의 나라 같은 모양이다. 이 정도면 한국에 적응하기보다는 다시 미국이민을 가는 쪽이 빠를 것 같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한 번은 시카고 피자에 대해서 명연설을 했고 그 이후부터 우리는 그를 ‘시카고’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첫 만남부터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는 시카고 다음에 만난 사람은 '1호차 기사'다. 

'1호차 기사'라는 말은 이 회사 대표의 전담 운전기사라는 말이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 중 하나였기에 임원의 급에 따라 운전기사들도 무수했다. 무수한 운전기사는 '전담기사'와 '업무기사'로 나뉜다. 전담기사는 수행하는 임원이 정해져 그 임원만을 전담으로 수행하는 운전기사이다. 그러므로 담당하는 임원에게 배정받은 차를 타고 다니며 관리의 편의상 수행하는 차를 평소에도 타고 다닐 수도 있다. 또한 전담하는 임원의 성격만 파악하면 되므로 장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새벽출근과 잦은 회식, 주말 수행 등이 업무기사보다 월등히 많았다.      


업무기사는 통근버스나 개인 출근수단으로 출근을 하여 그날의 일정과 필요에 따라 배차가 되어 다양한 임원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는 차와 수행하는 임원이 정해져 있지 않고 차나 사람이 계속 바뀐다. 이 경우 새벽출근 대신 정시 출근을 하고, 저녁회식과 주말출근이 적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양한 임원들을 만나기에 제각각인 그들의 성격에 맞춰야 하고 그때마다 새롭게 긴장해야 했다. 수행이 끝난 후 돌아올 차가 없으므로 적당한 대중교통을 찾아서 돌아와야 하는 단점이 있다.     


운전기사들 세계에도 엄연한 서열이 존재했다. '1호차 기사'가 제일의 계급으로 그를 필두로 부사장급, 전무급, 상무급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휴게실에서도 일반 업무운전기사보다 언제나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다. 어느 곳이든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계급'이 존재하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이는 자신이 모시는 임원의 급을 따져 보며 스마트폰으로 임원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름 석자를 치니 스마트폰 화면에 그의 기사가 나온다. 아침에 본 얼굴과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역시 화려한 학벌과 알 수 없는 전문용어들이 가득한 것을 보니 전문가임은 확실했다. 전문용어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결론은 우리나라 반도체를 이끌어갈 리더라는 사실과 직급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것. 임원의 직급을 말함과 동시에  자신도 한순간에 그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높은 위치로 시작한다는 것을 동료 기사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모시는 임원들을 '영감'이라 표현했다. 정식용어는 ‘담당’이나 기사들끼리는 영감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처음 만나면 영감의 보직부터 확인하고 어느 정도 사이가 익숙해지면 서로 영감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교류하며 정보를 나눈다. 정보랄 것까지 없는 게 들어보면 대부분 뒷담화에 가까웠다.  


"어제 우리 영감 완전 꽐라 됐다."

"나도 어제 사모님 만났어."


점심을 먹으며 기사들끼리의 대화를 듣다 제이가 사모님을 왜 만났냐고 물었다. 보통은 영감을 주차장에 내려주면 업무가 끝나는데 영감이 술에 잔뜩 취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날에는 영감을 부축해서 집 앞까지 데려다줄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초인종을 눌러 사모님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제이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모님을 만나려나?', 제이는 본 적 없는 영감의 사모를 잠깐 상상해 본다. 역시나 얼굴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봄 직한 사모님 캐릭터만 그려질 뿐이다.       


제이는 매일 새벽 4시 50분에 일어나 씻고 5시 10분에 집 밖을 나선다. 새벽이라 20분 만에 임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매일 5시 30분에 임원과 첫인사를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주말 새벽 골프가 있는 날이면 간혹 새벽 3시 대에 일어나기도 한다. 골프에 진심인 임원을 만나 주말에 더 일찍 일어난다. 당연히 제이에게 늦잠이란 있을 수 없다. 늦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초반에는 잠이 많은 제이가 일어나지 못할까 봐 내가 먼저 일어나서 잠을 깨우곤 했는데 이제 그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조용하고도 빠르게 집을 나서곤 한다.


잠을 적게 자는 삶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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