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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Aug 30. 2023

고급 골프장이 지겨울수도

#05. G90을 타는 운전기사

지내고 보니 영감의 골프사랑은 그야말로 집요할 정도였다. 날씨가 허락한다면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할 것 없이 어김없이 골프를 쳤다. 덕분에 제이는 아이들과 주말을 온전히 보낸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는다. 주말 일정이 미리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주에, 그것도 주말이 가까워서야 알게 되기 때문에 이번 주말은 쉬는지, 골프 수행을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당연히 예약이 필요한 나들이라든지 준비가 필요한 그럴싸한 주말 계획은 세울 수가 없다.


우리는 그저 주말에 제발 비가 오기를, 날씨가 좋지 않기를 바라며 아슬아슬하게 주말을 기다린다. 화창한 주말에 나들이를 꿈꾸는 보통의 가정의 바람과 역행하는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날씨가 흐리지 않으면 7일 내내 새벽출근을 하게 되면서 제이는 몸의 피곤함은 물론 이거니와 한 자세로 오래 고정되어 있으니 허리의 뻐근함을 자주 느꼈다.


주말 출근이 많은 경우, 또는 늦은 시간까지 회식 수행이 많은 경우 기사들은 이 일을 그만두기 쉽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요즘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요즘처럼 워라밸과 쉼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일은 한창 즐길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들에게나 단란한 가정에는 지속하기 힘든 일의 종류일 수도 있겠다. 참고 견디는 것에도 어느 정도 내공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 어떤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지속될 때에는 그 인내심이라는 능력 또한 억지로라도 늘어나니 저절로 단련이 될 수밖에. 그렇기에 제이는 이런 부분에 꽤나 탁월했다.

회사에서는 개인사정이 있으면 다른 기사를 투입할 수 있다고는 하였으나 전담기사를 맡게 된 이상 다른 기사에게 맡기기가 쉽지가 않다. 영감은 익숙한 전담기사를 좋아하지 대타가 오는 것을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제이는 주말에 골프장 수행을 다니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골프장을 매우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코로나로 골프인기가 한창이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수많은 골프용품이 중고시장에 나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골프는 초기 연습 때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이때 골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골프 장비를 구입하고 멋들어진 골프복장을 사들이며 초기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고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갈고닦은 실력을 가지고 필드에 나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이때부터 돈이 무수히 든다. 필드를 가득 채운 초록의 잔디처럼.


제이는 라운딩 비용을 계산해 보았다. 골프 라운딩 비용은 그린피, 카트비, 캐디비로 구성된다. 골프 한 라운드를 하는데 드는 비용으로 코스 사용료를 뜻하는 그린피는 주중, 주말이 다르다. 보통 주중에는 18~21만 원, 주말에는 20만 원~29만 원 정도 한다. 여기에 캐디비와 카트비가 있고, 그늘집 에서의 커피나, 간식. 라운딩 후 식사비용까지 하면 한번 라운딩 할 때 드는 비용은 다른 운동 한 달 수업료의 몇 배가 된다. 영감은 한 달에 6번 이상 라운딩을 하므로 몇 백만 원은 가볍게 뛰는 금액이다. 영감이 다니는 CC는 국내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골프장이니 다른 곳보다 비싼 편이다. 물론 영감은 회사의 회원권을 이용하고 식사도 법카를 사용하므로 본인 돈 들일은 없겠지만 일반인이 즐기기에는 꽤나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제이의 눈에는 드넓게 펼쳐진 초록의 잔디가 만원 다발처럼 보였다.


주말에는 주로 경기권에서 골프를 치므로 평일보다 더 이른 시간에 영감을 픽업해야 한다. 보통은 새벽 4시 30분쯤 영감을 픽업을 하고, 골프장에 도착하여 7시쯤 라운딩에 들어가면 5시간 동안 골프를 친다. 12시에 나와 샤워를 하고 점심식사와 술을 겸한 자리가 2~3시간 정도 이어진다. 이후 추가로 술을 먹는 날에는 그 시간이 더 길어진다.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의 기다림이 더 길고도 지루한 법이다. 제이는 이제 이 모든 기다림에 익숙해졌다. 아니 제이는 그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으므로 기다린다기보다 또 다른 출근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때론 대기시간이 지겨울 틈도 무료할 틈도 없이 금세 지나가기도 했다.


보통 오전 티업의 경우 추가로 술을 먹지 않으면 오후 세시 즈음에 식사가 마무리되어 집에 도착시간은 오후 5시쯤 된다. 제이는 이 도착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고 싶어서 곯아떨어진 영감을 태우고 그야말로 그 무거운 고급 세단이 도로 위를 살짝 떠 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속도를 낸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5시간가량 과도하게 비타민D를 충전하고 그 이후 알코올까지 넉넉하게 충전을 한 영감은 이 순간만큼은 깊은 수면의 세계로 들어가니 가능한 일이다. 제이는 백미러로 그의 수면상태를 살피며 한쪽으로는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액셀을 더욱 깊숙이 밟는다. 이때만큼은 영감이 통잠을 자는 신생아가 되어 깊은 잠을 자길 간절히 바란다.


오로지 아파트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미션임파서블' 혹은 '분노의 질주'를 찍으며 영감을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비로소 삑삑삑, 번호키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면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주말이 시작된다. 주말이 끝나가는 아쉬움이 마음 한쪽에서 피어올 때쯤 우리의 짧은 주말이 시작된다.  



제이는 기다리는 동안에도 밀린 건축 견적에 대해 통화를 하느라 시간을 금세 소진하고 있었다. 주문을 받고 매입처에 전화를 돌리는 일을 몇 차례 하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의 시간을 확인하고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차 창밖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맵씨 좋게 골프복을 입은 남녀의 모습도 보인다. 제이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이 잘생긴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신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 옆에는 데이트를 가장한 알바가 아닌 진짜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그녀가 앉아있다.


상상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내일이라도 당장 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 정도로.

오늘따라 잔디가 더욱 짙고 푸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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