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IMF)가 터지면서 본사 설계부 신입사원들 중 L과 나만 남고 나머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정리해고가 되었다.
전문건설업체였던 회사는 당시 일본과의 기술협약과 연구개발등으로 토목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이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인재가 필요했다. 둘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냉혹한 사회였지만 요행은 아니었다.
신입사원 동기 중에서 토목기사 1급 자격증 보유 외에 Auto Cad와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당시엔 플로피디스크를 쓰던 시절이었다) JLPT와 TOEIC 등 공인외국어성적을 가진 사람도 나뿐이었으니깐.
설계 엔지니어 총팀장인 정이사님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던) L을 데리고 일본 기술자들을 만나고, 골프를 치고, 접대를 하며 다녔다.
일할 신입 사원은 나밖에 남지 않아 일 폭탄을 떠맡아야 했다.
바쁜 설계업무 와중에도 일본 기술자들이 함께 데려온 여친 또는 그 아내들을 모시고 백화점에 다니는 것이 업무 외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L이 좋은 책을 선물 받을 때 난 보석함을 받았고,
L이 인맥을 쌓아 가고 있을 때 난 그녀들에게 줄 신화 CD를 쌓아 가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에서도 살아남은 나였다.
하지만,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간과했지.
2년 후, 인사고과에서 L만 대리로 진급을 했다.
표지에 금박으로 입혀져 있던 글자가 다 닳아서 없어진, 반평생을 나와 함께 한 일본어한자 읽기 사전.
내년이면 난 일본어 번역 28년 차가 된다.
1997년~2010년까지 토목분야 150여 건.
[기술서적 40권 / 전문서적 6권 / 기술자료 23권 / 설계서 6권 / 보고서 23권 / 자문서 1권 / 논문 36권 / 강연원고 3권(일역)]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게 이런 게 아니었을까?
대리 진급이 누락된 이후로
미친 듯 번역, 전공 공부, 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빡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건 치열한 삶이 아니라,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은 그때의 나에겐
삶을 영위하든지 죽음을 무릅쓰던지 둘 중의 하나인 삶이었다.
머리맡의 자리끼, 물주전자 옆에는 항상 각성제가 있었다.
죽도록 이대리를 이기고 싶었다.
정이사가 잘못된 결정을 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이건 그들이 망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야망이 나를 갉아먹을 동안
내 가정은 외면되었고
내 아이는 유산되었고
난 점점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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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남편에 의해 강제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가 내 인생의 모토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삼십 대 때의 나의 일그러진 홀로주체성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정한 가치, 목표, 신념보다도 질투와 오로지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으로 인해 내 안의 선함과 인간성을 철저하게 노예로 삼았던 결과였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제, 그때의 정이사의 나이가 되어~ 그때의 이대리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다.
엔지니어로서 입사했지만 정이사의 개인 남자 비서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경영과 정치는 배웠지만 정작 회사의 선배와 상사들과의 유대관계는 단절되어 버린 그는 혹 외롭지 않았을까.
난 질투가 아니라 유일한 동기인 그를 위로해주었어야 했다.
(이대리는 얼마 있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신과 주변을 노예로 삼아 주체성을 잃지 말 것.
피곤에 지친 자신을 채찍질하며 몰아세우지 말 것,
성공 성공 성공에만 연연하지 말 것.
내 지난 삶을 반추해 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