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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rmann Husse Mar 06. 2024

04 안아줘, 나의 힘겨운 하루

끈적끈적한 습기에 숨 막힐 듯했던 지난여름,

오랜만에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던 퇴근길~


서너 살쯤 된 아이를 안은 엄마가 버스에 올라탔다.

한 팔 엔 아이를 품고, 다른 팔 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손에는 아직 끈으로 훌치지 못한 장우산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으로 버스결제를 마친 아이엄마는 손잡이를 잡을 비는 손이 없어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버스 안으로 몇 걸음 들어왔다.

곧바로 일어나 아이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하니 자신의 상황에 미안해한다.

"이번에 내립니다"

(덜 미안해하도록 최대한 짧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이 글로 옮겨보니 너무나도 냉소적으로 들린다.)


그들이 앉은 좌석 한 걸음 뒤로 비켜서서 내려다본다.

빨간 시럽 병이 담긴 약봉투, 휴지, 지갑, 손수건, 과자들, 작은 클러치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방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아마도 집 근처에 소아과가 없어 먼 병원까지 가야 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연신 콧물을 줄줄 흘리며 엄마에게 과자를 달라고 떼를 쓴다.

콧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과자가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손수건으로 아이의 코와 입을 훔친 엄마의 손은 쉴 틈 없이 곧바로 아이의 머리카락으로 향한다.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작은 형광색 고무줄로 묶어준다.

모녀에게 직접 바람이 가지 않게, 좌석 위에 있는 에어컨 송풍 방향을 창문 쪽으로 돌리는데, 질끈 묶어 올린 집게핀 사이로 삐져나온 아이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내 시선이 꽂혔다.


아이가 과자를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필 쿠크다스이다.

바닥에 떨어지는 중력과 상관없이, 세 살 아이의 손아귀 힘만으로도 쉽게 부서지는 과자가 아니던가.

아이는 다시 과자를 달라며 징징거리고, 

와중에 버스기사는 폭우 때문에 정체되는 도로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갑자기 소머즈 귀가 작동을 한 건지.

"거 쓰레기, 바닥에 흘리지 마쇼"라며 짜증을 낸다.

마치 '저 놈 언제 바닥에 과자 떨어뜨리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아직 아이의 한쪽 머리밖에 묶지 못한 엄마는 당황해서 그 아가리 큰 가방에서 뭔가를 찾는다.

(아이 엄마가 가방에서 9mm 글록 권총을 꺼낸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그런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는 우산 겉면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 위에 처참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바닥을 닦았다.

버스 기사분 한번 흘겨보랴, 쪼그린 상태에서 눈 마주친 아이에게 윙크 날려주랴.

내 나이(?)엔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약간의 반작용이 필요하다.

'끙~'이라는 도약음과 함께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아이 엄마의 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가 다리를 까딱까딱거리며 묻혀놓은 신발의 온갖 더러운 얼룩들이 검은색 조거팬츠에 어수선하게 찍혀 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다섯 정거장은 더 남아 있었지만 하차를 했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바람에 젖은 옷들이 몸에 감겨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아이 아빠가 퇴근하고 와서 아픈 아이의 몸 상태를 물어봤겠지?

그리고

"비도 오는데 오늘 당신 더 고생했겠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라며 아내를 안아주었을 거야.

그럼 아내도

"당신도 오늘 회사에서 잘 버텨주셔서 고마워요" 안긴 상태에서 남편을 올려보며 미소 지었을 거야.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 여유롭게 마시고 싶어...

이 얼마나 소박한 바람인가.

하지만, 아이 엄마에게는 이런 바람을 가지는 것조차 아득하다.



made by hurmann husse


겨우 잠이 든 아이를 조심스레 눕혀 놓고, 

맘 같아서는 온몸에 찬물 한 바가지 끼얹고 싶지만 그 촤~~~ 하는 물소리마저 신경 쓰여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조용히 머리를 감는다. 

살 것 같다~ 나 오늘 완전 엘라스틴 했어요~!!!

그러다 아이 우는 소리에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0.1초 만에 후다닥 달려 나간다.

큰 아이 유치원에서 온 문자소리에 애가 깬 모양이다. 

한숨을 내쉬며 문자를 보니 내일 준비물이 한가득이구나. 곧장 둘째를 유모차에 태워 마트로 향한다.

선잠을 잔 탓에 마트에서 계속 칭얼거리던 아이가 결국 손사래를 치며 짜증을 낸다.

아이 손 끝에 닿은 물건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아이는 제 성이 안 차는지 더 발악을 하고

주변 사람들은 '어휴 저 맘충' 하는 말을 날 선 눈빛으로 내뱉고

난 떨어진 물건들을 매대에 다시 올려놓느라 허둥지둥 정신이 없고

유모차 아래 달린 망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장본 물건들을 서둘러 싣고

도망치듯 마트를 나와 집으로 온다.


현관 거울 속에 '떡'진 머리의 한 여자가 있다.

(조금 전 린스칠을 잊고, 아이 우는 소리에 급히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나왔다가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그대로 마트로 향한 탓이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서로 뒤얽히고 엉켜서... 머리꼴이 너무도 처참했다)

잠옷이자 생활복이자 외출복이 되어버린 아디다스 츄리닝은 곳곳에 삼선이 터지고 색이 바래진 채 늘어져 있고,

퉁퉁하고 지쳐 찌든 얼굴을 한 여자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새벽, 작은 아이의 뒤척임에 잠이 깼다.

어두운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으니, 

눈물 흘릴 타이밍조차 없었던 어제의 내가 떠올라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꺽 꺽 울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내 기억 속 

가장 슬프게 허물어졌던 새벽이었다.




여인의 초상 Potret Kobiecy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게 스스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쉽고, 불가능하고, 어렵고, 그래서 더더욱 해볼 만한 일이다.

필요하다면 그녀의 눈동자는 때로는 짙푸르게, 때로는 잿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리라.

검은빛을 띠다가도 때로는 명랑하게,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을 머금으리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단 한 사람, 혹은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되어

그와 함께 곤히 잠자리에 들리라.

그를 위해 네 명이거나, 한 명도 아니거나, 아니면 단 한 명의 아이를 낳아주리라.

순진무구하지만, 가장 적절한 충고를 하게 되리라.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리라.

목 위에 머리가 없지만, 곧 갖게 되리라.

야스퍼스와 여성지를 동시에 읽게 되리라.

나사를 어디에 조여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근사한 다리를 만들어 세우리라.

항상 그래왔듯 젊은 모습으로, 갈수록 더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

양손에는 날개가 부러진 참새와,

길고도 머나먼 여행을 위한 약간의 여비와,

고기를 토막 내는 식칼과, 붕대와, 한 잔의 보드카를 들고,

어디를 향해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지, 피곤하지도 않은지.

많이 고단하건, 조금 고단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이건, 아니면 아집 때문이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혹은 신의 가호 덕분이건.


made by hurmann hu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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