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엔 타투가 세 군데 있다.
왼쪽 팔목과 팔꿈치 사이에 하나,
경추 6번과 7번 사이에 하나 그리고 the other.
(나머지 하나를 찾으라 하면 으레 등판과 엉덩이에 걸쳐 잉어가 열 마리쯤 노닌다던지 호랑이나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시던데, 맘대로 상상하도록 답은 알려주지 않겠다)
타투가 흔한 젊은 세대와는 달리,
내 연령대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이덴티티(Itentity)이자 확실한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로 사용된다.
백 마디 말보다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메러비안(Albert Mehrabian)의 법칙이 있다.
의사소통을 할 때 시각적 요소(표정, 몸짓, 자세)가 55%, 청각적 요소(음색, 음정 및 속도)가 38% 그리고 언어적 요소(단어)는 메시지 의미의 7%에 불과하다는 '7-38-55 규칙'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위의 연구 결과만을 가지고 모든 상황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고운 목소리로 마녀는 죽이고(청각적 요소)
두부를 들고 온 전도사에겐 '너나 잘하세요'(언어적 요소) 말 한마디로 주변의 모든 것을 정지시켜 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약하게 볼까 봐, 마음이 약해져 결심이 무뎌질까 봐, 친절해 보이기 싫어서 결국 그녀가 디펜스 메커니즘으로 선택한 방법은 눈두덩이를 붉게(시각적 요소) 칠하는 것이었다.
가장 쉽고도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오수희와 포옹을 한 상태로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괸 채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여인이 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은 눈두덩이 절반을 채운 붉은색 쉐도우를 더 짙어 보이게 한다.
수희가 묻는다
"왜 이렇게 눈만 시뻘겋게 칠하고 다녀?"
얼굴 근육의 어떠한 미동도 없이 금자가 대답한다.
"친절해 보일까 봐"
이금자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잘린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린 여자'의 조형물이었다.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한 줄의 바이올린 음이 이어진다.
짧은 스타카토를 힘겹게 끌고 가며 내뱉는, 신음 같은 긴 선율이다.
(어떻게 하면 저 장면을~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글로 잘 묘사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친절한 금자씨'를 몇 차례나 되돌려봤지만... 이 정도가 한계인가 보다)
사전적 의미로 난 '아주머니'가 맞지만,
또 다른 사전적 의미로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은 불쾌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타자의 말속에 무례와 무시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의 지도교수가 무례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말실수였다며 사과를 했지만 그 비릿한 웃음의 저의는 분명했다.
아이 둘 키우며 뒤늦게 공부한답시고 나대는 내 처지가 서글펐다.
서러웠고, 이 모든 게 내 욕심인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1분 동안 머릿속을 시끄럽게 돌아다니던 온갖 감정들로 이내 난 분노하였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오후 강의를 위해 손에 쥐고 있었던 레이저포인터로 사람을 해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간 곳이 타투샵이었다.
블라우스와 샤넬목걸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브래지어만 걸친 채 팔과 목 뒤에 타투를 새겨 넣었다.
타투와 어울리지 않는 행색의 손님이 내내 무거운 인상만 쓰고 있던 탓에 타투이스트는 별 말을 걸지 않았다.
시술 중 약간의 쇼크로 잠시 엎드려 있는 나에게 조용히 바나나 하나와 종이컵을 내밀었다.
"심장과 가까울수록 쇼크가 종종 옵니다. 미지근한 물을 드셔서 몸 안을 약간 데우면 좋아요."
"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
...
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내가 받은 쇼크가 남들의 무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처해 있는 환경 때문이었는지,
초당 100번의 진동으로 내 척추 위 피부를 찔러대는 타투 바늘 때문이었는지,
다 괜찮아지실 거라는 타투이스트의 말에~
그가 준 따뜻한 물 한잔에~
엎드려 시술받는 동안 내내 울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강의는 무사히 마쳤다.
전에 없이 강의실엔 적막이 흘렀다.
하얀 블라우스 소매와 깃에는 방금 시술한 곳에서 나온 피와 진물로 제법 그로데스크(grotesque)한 문양이 퍼져 있었다.
그때 팔에 새긴 문구가
Non, Je ne regrette rien.
아뇨,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선택한 모든 것에 후회하지 않겠다!!! 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난, 분노하면 화장실을 간다.
'조영욱 음악감독' 폴더를 찾아 음악을 틀고 심호흡을 크게 내뱉은 후 눈을 감는다.
수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음악소리가 진공상태 같은 화장실에서 붕붕 울린다.
거울에 비친 나의 타투를 보고 있으면 목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사그라들고
음악 속 스타카토가 강렬해지면서 사그라진 분노는 에네르기(energy의 일본식 표현)가 폭발하듯 올라온다.
버벅거리지 말고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난 지금 존나 미친년이다.
아이쉐도우 색상 하나 바꾸는 것이,
그동안 자신을 위축시켰던 것을 잊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과감하고 냉철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기꺼이 처바르고 싶지 않은가?
칼에 그인 긴 상처 같은 저 타투는,
매번 각성을 일깨운다.
100번씩 다짐을 적는 것보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게
각성 레벨업 강도를 더 빨리 더 강하게 높여준다.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생겼으니,
더 이상 저것들과 구질구질하게 말 섞지 말자.
오늘 내 글엔 특유의 허세도 재미도 감동도 없다.
깨달았다.
난 화가 나면 웃음도 위트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힘든 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