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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rmann Husse Feb 21. 2024

02 크고 강한 파도가 올 확률

5F 길드원 모입시다!

▶ 기온 16도

▶ 오프쇼어 바람 20 kts

▶ 1.2m 만수위

▶ 남동쪽 1.5m 파고, 피리어드 9.0s

서핑 단독판에 공지사항이 올라온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비명과 설레발치는 이모티콘으로 난리가 났다.

(5F 길드원 : 5시간 동안 Full로 서핑할 길드멤버 / 오프쇼어 : 육지에서 바다를 향해 부는 바람 / 피리어드 : 파도의 간격으로 9.0s 이상이면 윈드스웰이라 한다. 보드 뒤집어지면 통돌이 당할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추석 이후 가을은 서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가을바다의 변화는 예측가능한 오차를 잘 벗어나질 않아서 계획 세우기도 좋다.

WSB FARM과 Windfinder 앱으로 파도상황을 확인해 보니 진짜 끝내준다.


드.디.어

내일 크고 강한 파도 온다!!!


늦은 밤, 스마트폰 화면에 [한 OO]라는 이름이 떴다. 첫 직장의 사수였던 분이다.

"일 관련해서 내일 잠시 만났으면 해. 시간 좀 맞춰 줘."


만나기로 한 로카보어테이블에는 한 전무님 외에 신 상무님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신 상무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뉴럴라이저'로 삭제되었던 옛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더니 이내 괴리감이 사라졌다.

전설의 술주정 사건과 복장불량 일화엔 시큰둥하게 맞받아쳤지만,

살벌했던 오피스 복수극 언급엔 잠시 움찔했던 것 같다.

없던 괴리감이 다시 생겼다.



공부 계속하고 있지? OO야,

이제 그만 합류해라!

갑자기 라이트 훅이 들어왔다.

앞뒤 설명도 없다.


최소 차장 이상! 9 to 5

나도 레프트 훅으로 맞받아쳤다.


(잠시 생각) 옥케~이! 우리 잘해봅시다.



미팅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에 차오르는 기분 좋은 몽롱함으로 붕 떴던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카톡음이 수십 번 울리고서야 정신을 차려보니,

단톡방에 액션캠으로 찍은 동영상들이 왕창 쏟아지며 로딩되고 있었다.


아~ 맞다...서핑! ㅠㅠ


나만 빼고 즐거운 길드원들


갑자기 맞닥뜨린 기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키아벨리 어록 '전략론'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행운이 미소 짓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 게을리하지 않고 해 두면,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마자 즉각 움켜잡을 수 있다. 좋은 기회는 당장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게 마련이다.

주자학에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水到船浮(수도선부)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뜬다는 말로, 준비된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뜻이다.


1년만 더, 1년만 더,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끈질기게 준비한 기간만 10년이 넘는다.

나에게는 기회가 왔지만,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해오고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중년 이후의 삶에 그대로 정착해야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10년이나 준비해서 고작 이런 소박한 성과 하나 얻었다고, 내가 크게 환호하며 무릎 슬라이딩 세리머니라도 할 줄 알았나?

인간을 저평가했던 15세기의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와

여성의 윤리와 희생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집대성자 12세기의 주자(朱子)가

경단녀의 미래 따위를 배려했을 리 없다.

즉, 그들이 말하는 전략과 수도선부는 적어도 나에겐 개소리다.


왜 나인가?

다니던 공기업이 지방으로 이전되어 수도권을 벗어나게 된 상황을 문화시민탈락이요 자신이 갤럭시급으로 되었다는 자조와 함께 퇴사를 결정하는 세대.

연봉보다 나의 워라벨, 자신이 우선시하는 가치들이 더 중요한 세대.

하물며 그런 세대들이 지방 소도시나 시골로 들어가 바짓단에 진흙 묻히면서 젊은 시절 보내고 싶을까.

SKY 토목공학과를 나온 한 직원이 울릉도 현장에 파견되어 2개월에 한 번씩 뭍으로 나오는 생활을 하게 되자, 이를 알게 된 부모가 '우리 애 이런 일 시키려고 대치동에서 공부시킨 거 아니다'라며 데리고 나간 사례는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다시,

왜 나인가?..

지금 당장 일할 사람이 필요한데 언제 실무 익히고 언제 공부시키나, 무엇보다 이 일을 할 젊은 인재들이 없잖아.

나 아니면 대안이 없어!

자칫 들떠서 "뼈를 묻겠습니다"라고 스스로 알아서 상명하복의 자세를 취할 '뻔'했던 이제야 아찔하다.

내일 전화해서 연봉 협상을 해야겠다.

나의 인생 후반기에 큰 파도가 오긴 했으나 '기;썬'을 잡는 건 내가 되어야 했다.


다음 날 오전, 언질도 없이 집으로 데스크톱이랑 대형모니터, 주변 컴퓨터 부속품들이 배송 설치되었다.

그렇다... 신상무님은 나보다 두 수를 앞서 보고 계셨던 거다.

예측 가능한 오차는 크게 벗어났고,

이미 연봉은 후려쳐진 것 같다.

분해서... 새 데스크톱에 FIFA 온라인게임을 가장 먼저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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