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내가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아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버텼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속도가 붙는다.
말이 빨라지고, 생각이 앞질러 가고, 몸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그 가벼움은 처음엔 희망처럼 보인다.
나는 드디어 돌아온 것 같았다. 드디어 제대로 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나도 정상처럼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날의 나는 오랜만에 숨이 트였다.문제는 그 ‘숨이 트이는 기분’이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기분이 올라오면 세상도 같이 올라온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갑자기 많아지고, 미뤄두었던 것들이 한 번에 해결될 것 같고,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때의 나는 나를 믿는다. 평소보다 훨씬 더.
그 믿음이 너무 커지면 나는 작은 경계들을 쉽게 넘는다.
잠을 조금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돈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말을 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 몸에 “지금은 한계가 없다”는 거짓말이 걸리는 것처럼.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조금 위험해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리고 늘, 어느 순간부터 다른 기분이 끼어든다.
이유 없이 예민해지고 사소한 말에도 마음이 찢어진다.
불안이 올라오는데 동시에 에너지는 남아 있다.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머리는 멈추지 않는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고 눈은 뜨거운데 마음은 차갑다.
내 안에서 서로 다른 기분들이 부딪치기 시작한다.
울고 싶은데 화가 나고, 화가 나는데 또 갑자기 무너진다.
나는 그게 너무 이상했다.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왜 이렇게 감정이 변하지?”
“왜 내가 나를 통제 못 하지?” 그러다 결국 가장 잔인한 결론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상태를
겉으로만 본다.
갑자기 밝아진 사람, 갑자기 추진력 있는 사람, 갑자기 말이 많아진 사람. 그리고 그 다음에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침묵,
연락 두절, 무기력과 눈물. 그 사이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
“쟤는 감정 기복이 심해.” “쟤는 컨디션을 핑계로 일을 미뤄.” “쟤는 사람을 피곤하게 해.”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 있던 설명을 잃어버렸다.
나는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건데, 나는 정말 조절이 안 돼서 그런 건데, 나는 정말 무너지는 순간이 너무 무서워서 숨은 건데. 그걸 다 말하고 싶어도 정확히 말할 단어가 없었다.
나는 늘 “그냥”이라고 말했다. “그냥 좀 그래.” “그냥 피곤해.” “그냥 마음이 별로야.” 그 ‘그냥’ 안에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정신과에서 나는 처음으로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이건 성격이 아니고, 인성이 아니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하루의 컨디션이 아니라 ‘증상’의 파도일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무섭기도 하고 이상하게 안심되기도 했다.
무서운 건, 내 삶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이었고 안심되는 건, 그래도 이게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왜 가끔 이렇게 빨라지고, 왜 가끔 이렇게 예민해지고,
왜 가끔 이렇게 무너지는지. 그 이유가 조금씩 언어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겪는 건 단순히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는 동시에 서로 다른 감정들이 겹쳐지는 날이 있었다.
좋고 싶은데 불안하고, 웃고 싶은데 눈물이 나고,
살고 싶은데 모든 게 귀찮아지고, 뛰고 싶은데 숨이 막히는 날.
그럴 때 나는 “내가 두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나는 두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버티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람의 하루가 너무 많은 감정으로 동시에 흔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려고 한다.
내가 갑자기 가벼워질 때, “와 드디어 괜찮아졌다!”라고만 믿지 않기. 내가 갑자기 말이 많아질 때,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하지 않기.
내가 갑자기 세상이 쉬워 보일 때, “지금은 한계가 없다”는 착각을 조심하기. 그리고 그럴 때 내가 나를 잡아주는 아주 작은 규칙들을 만들었다.
잠은 줄이지 않기.약속은 늘리지 않기.돈은 바로 쓰지 않기.
결정은 지금 하지 않기.이런 것들은 나를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안전장치가 됐다.
예전의 나는 내가 나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가 내 삶을 조금 바꾼다. 나는 여전히 기분이 나를 앞지르는 날을 겪는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그 날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무서웠던 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설명 없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조금씩 설명을 얻고 있다. 설명이 생기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바라는 가장 큰 회복이다.
나는 완벽하게 안정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흔들려도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그리고 오늘도 그 연습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