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안도보다 먼저 거부감을 느꼈다.
이걸 먹는 순간 나는 정말 “아픈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이걸 계속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내 삶이 영영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약 봉투를 가방 깊숙이 넣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내가 나를 보지 못하게.
약을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달고 다닌다.
의존, 약함, 실패, 포기. 그 단어들이 약보다 먼저 떠올랐다.
“약 없이는 못 사는 거야?” “그 정도면 그냥 마음이 약한 거 아니야?”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끊기 힘들다던데.”
그 말들은 내가 스스로에게 하던 말과 닮아 있었다.
나는 약을 믿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약을 먹는 나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약을 빼먹었다.
괜찮은 날에는 “오늘은 안 먹어도 되겠지”라고 생각했고,
조금 나아진 날에는 “이제 필요 없나 보다”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늘 결과는 같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집중은 흐트러졌고, 기분은 다시 빨라지거나 가라앉았고,
나는 또다시 나를 다그쳤다.
“봐, 역시 약은 의미 없어.” “결국 문제는 나잖아.”
그때의 나는 약이 아니라 나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약은 당신을 바꾸려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의 당신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도구예요.”
그 말은 내가 알고 있던 ‘약’의 이미지와 달랐다. 약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나로 기능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약을 ‘대체물’로 생각했다. 내 의지를 대신하는 것, 내 노력을 가리는 것, 내 부족함을 숨기는 것.
하지만 그 말 이후로 나는 약을 ‘보조물’로 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안경을 쓰는 사람에게
“왜 눈으로 버티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지팡이를 짚는 사람에게 “왜 다리 힘으로 극복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왜 이렇게 쉽게 묻는다.
“왜 약까지 먹어?” 그 질문은 도움보다 판단에 가깝다.
약을 먹고 나서 내 삶이 갑자기 쉬워진 건 아니다.
여전히 미루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넘어질 때 바닥까지 곤두박질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번 무너지면 며칠, 몇 주를 잃어버렸다면 지금은 조금 더 빨리 돌아온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약을 먹으면서 비로소 나를 관찰할 여유를 얻었다. 감정이 올라오는 속도를 느끼고,
집중이 빠져드는 지점을 알고, 내가 위험해지는 순간을 조금 더 일찍 알아챈다.
약은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게 나에게는 충분했다.
여전히 약을 먹는 내 모습이 낯설 때가 있다. 물과 함께 삼키는 그 작은 알약이 내 하루를 좌우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게를 이렇게 다시 부른다. 이건 의존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건 포기가 아니라, 관리다.
이건 약함이 아니라, 책임이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 선택을 했다. 언젠가는 약을 줄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한다. 그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약을 먹는 나는 망가진 내가 아니다. 살아보려는 나다.
그 사실을 오늘은 조금 더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