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갑진년 병자월 임자일 음력 11월 14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 라는 목표를 가지게 되면 그 과정은 수단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그 과정이 수단이 되고 마는 경향이 있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기보다는 현재의 현실에 집중하며 흐름에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했다. 물론 집중하지 못한 채 그저 몸을 맡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살다 보면 삶의 방향성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는데, 뚜렷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다가 삶의 흐름이 바뀌었을 때 융통성과 유연성이 부족하여 방황하는 사람을 일부 마주했던 게 목표를 구체화하지 않는 데에 한몫했을까.
난 그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에 지금 이 순간 나아갈 길만을 바라보는 막연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와 상황에 따라 체계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직면하거나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점에 도달해야 비로소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한다.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미래까지 계획하는 것이 아닌, 예측 가능한 선까지만 조금씩, 그것도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으로 계획한다.
평소에 일정을 관리할 때도 캘린더 어플에는 잊지 말아야 할 활동들을 적어놓고, 다이어리에서는 연간/월간/주간 일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내일의 것을 미리 준비하기보다는 오늘의 것만 생각한다. 미래 어느 시점에 대한 일정을 잡을 때는 캘린더 어플에서 겹치는 일정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각각의 일정들에 대한 이동 시간 및 고려 사항은 당일 아침, 빠르면 전날 오후에야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 있는 연간/월간/주간 일정 위주의 다이어리는 성향에 잘 맞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적당한 사이즈의 노트에다가 하루에 한 페이지씩 내용을 채워 넣는 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가족이 한국투자 2025 달력을 던져 주고 갔는데, 주간 일정이 없고 연간/월간 일정 뒤에 전부 날짜 칸이 있는 유선 노트 페이지여서 조금 마음에 들었다. '조금'인 이유는, 그 페이지가 284일 분량으로 1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페이지 수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전체 160장에 8장마다 이음새가 있는 제본 형태나 구경하고 있었다.)
글을 쓸 때도 전체적인 구상을 하고 쓰지는 않는 편이다. 학교에서 배울 땐 기승전결을 고려하여 각각의 구간에 어떤 내용을 적을지 판단하고 계획하여 글을 쓰라는 식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한 문단을 써 내려가며 다음 문단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뿐이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정해놓고 쓰지 않기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이 본문에 들어가기도 한다. 때로는 이 문단을 마치고 나서 다음 문단에 대한 생각이 잘 나지 않아 문단과 문단 사이에서 오래 머물러 있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활동했던 분야에서 겪었던, 상황에 따라 당일에도 변동사항이 있을 수 있는 업계 특성이 어느 정도 반영된 성향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반대로 이런 성향을 타고났기에 그런 업계에서 그런 변동사항을 받아들이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순간의 선택과 흐름에 따라 현재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도 그런 흐름 속에서 차차 선택해 가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다. 그런 삶 속에서 나의 선택이 후회로 남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