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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하며

by 단휘

“고립은둔 청년 아니신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조금 거슬렸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싶었다. 내가 느끼는 정서 불안과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겉보기에는 그래 보이나? 남 일이라고 막 말하는 건가? 대체 왜 그러는 건지. 하지만 곱씹을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긴 하겠다.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 참여 1년 차인 사람이 보는, 2022년 하반기에 사단법인 씨즈를 만나 청년이음센터를 거쳐 청년기지개센터까지 오게 된 나의 모습이란. 그 기간 동안 모든 순간에 늘 지원사업의 수혜자였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원사업 3년 차를 살아가는 내가 아직도 이전과 같은 상태라면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저 말은 나의 지난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그리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 아닐까. 어떤 식으로든 지원사업이 나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어, 여러 의미로 성장했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과거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의 성장을 알아봐 준 그분께 감사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립이고 은둔이고 그런 게 뭔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기에 도움을 받지 못했던 내가 있었다. 10대 시절부터 동급생과 어울리지 못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업 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하던 내가 무언가 충족되지 못하고 겉도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과 다른 성향 때문이겠거니 하고 인간관계를 삽질하다 실패하고 방황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인간관계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얕은 관계와 대학생 때의 스터디 및 멘토링을 통한 인간관계였지만, 나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도 나를 그저 공부를 도와준 멘토 정도로 생각하지 유의미한 친목을 도모할 수는 없었다. 보통은 극단 활동을 한다고 하면 가족 같은 분위기를 예상하는데, 나는 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극단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겉도는 느낌 밖에 받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것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사회적인 이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2022년 가을의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마땅한 수입 없이 방황하고 있던 내가 청년수당을 받으며 여러 가지 삽질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 다시 그 지원사업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면 좀 더 유의미한 방향으로 소비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한 달에 50만 원씩 6개월이라... 사실 300만 원을 한 번에 받을 수 있었다면 아이패드도 사고 이것저것 시도해 볼만하겠지만 50만 원 단위로는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제약이 많았다. 물론 그 금액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이것저것에 참여하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긴 했다. 배우 훈련 자금으로 절반을 소비한 것 같고, 나머지도 그럭저럭 엄한 데 쓴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이다.


하여간 그 해 연말에는 그 청년수당 수혜자를 대상으로 버크만 검사라던가 갤럽 검사 같은 걸 받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광화문 광장에서 하는 청년의날 행사에 대한 안내 문자도 받았다. 청년의날 행사에 간 김에 그 주변의 이것저것을 둘러보다가 말랑말랑모임터 부스를 마주친 게 나의 고립은둔청년이라는 개념에 대한 첫 마주침이었다. 사단법인 씨즈에 대한 소개, 두더지땅굴 사이트에 대한 소개, 두두레터라는 뉴스레터에 대한 소개, 그리고 이것저것. 당시에는 이벤트에 눈이 멀어 두더지땅굴 사이트에 가입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던 것들이 단순히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부정하면서 가볍게 취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는 편이 나에게, 그리고 내 주변에게, 서로에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난 가끔 말랑말랑모임터에 발을 들이는 녀석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두더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름이 바뀐 뒤로는 가본 적이 없다. 관심이 가는 프로그램이 있을 때 종종 가긴 했지만 불광역에서 조금 걸어가야 있던, 은평구에 있는 그곳은 서울 동부에 살고 있는 나에게 지리적인 진입장벽이 있었다. 가끔 미노루 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분 중 지방에서 올라오셨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곳에 방문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타코야끼 만들기 같은 것을 할 때 먹을 것에 이끌려 방문한다거나 하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구독하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서울시 뉴스레터에서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에 대한 안내를 마주한 건 그로부터 몇 개월 더 지난 후의 이야기다. 그 어느 봄날의 나는 홀린 듯이 클릭하고 신청했고, 연락을 받은 후 일정을 조율하여 성북구에 있는 생명의전화사회복지관에 면담을 하러 갔으며, 그 결과 청년이음센터에 배정되었다. 전년도에 연이 닿았던 사단법인 씨즈도 이 지원사업에 함께 하는 모양이던데, 그들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상태의, 사회에 나갈 용기를 좀 더 얻은 청년들을 위한 일경험 위주의 활동을 한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보다는 인간관계의 개선을 원했다. 사람들과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길 바랐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가벼운 관계가 아닌, 특정 목적을 위해서만 짧게 만났다 헤어지는 관계가 아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를 바랐다.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름 유의미한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사람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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