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용기 내어 나아가보기
솔직히 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는 못 하겠다. 일단은 그저 생존을 목표로 하고 있다, 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경계에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살아 있으니까, 그렇다고 죽을 이유는 없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던 삶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마음먹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많이 서툴고, 뚜렷한 방향성도 잡지 못한 채, 그렇게 방황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걸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마 전에야 들었다. 그들은 생존을 기본으로 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목표로 나아가니까.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사는 게 아니라 현실과 더 나은 이상의 경계에 사니까. 그들이 보기에 우린 그저 노력하지 않는, 목표가 부족한 녀석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에게 왜 달려볼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하면, 아직 그 정도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당장 내 손에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본 게 작년 상반기의 일이다. 비전공자지만 몇 년을 붙잡아온 연극 연기도, 이제는 거의 잊힌 IT 지식도, 그나마의 흥미를 느끼던 클라이밍도, 어쩌다 보니 교직 이수를 하게 되어 생긴 교원자격증도, 아주 약간의 출판 편집 기술까지도 무엇을 어떻게 조합해서 어떻게 살려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현재의 정신 상태로 연기를 붙잡고 있긴 힘들 것 같고, 기본 피지컬이 부족하여 당장은 클라이밍으로 무엇을 해볼 수는 없을 것 같고(언젠가 역량을 쌓으면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따는 데에는 관심이 있다), 교육도 개발도 출판 편집마저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 같았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기보다는 기존에 가진 것들을 활용해서 나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나마 그중에서 무언가를 키워나간다면 어디가 좋을까. 그러다가 출판 편집과 연결 지어 Adobe 제품군을 잘 다룰 줄 알면 좋을 텐데, 하며 디지털 콘텐츠 분야의 일경험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실제로 하게 된 것은 영 다른 분야의 무언가였지만.
일경험 프로그램이 끝난 후 그다음의 무언가를 찾지 못한 지금, 어찌 되었건 어디로든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는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만 26세면 객관적으로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긴 하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대학 입학해서 졸업할 때쯤 인턴이든 뭐든 해서 취업한 사람이라면 이미 직장생활 3~4년 차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아직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 슬며시 묻어갈 수 있는 나이다. 다만 그 어떤 분야로도 뚜렷한 관심도 재능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나마 재능이 있는 영역이 교정 교열이었는데, 원고에 띄어쓰기가 두 칸 되어 있는 것을 찾아낸다거나, 표가 1mm 정도 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1인출판을 하며 외주를 주곤 하던 지인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출판사에 마케터로 취업하면서 끊기게 되었다. 이 분야가 경력을 내세우거나 포트폴리오 같은 걸 작성하기도 애매해서 보통은 편집자로 일하던 사람이 퇴사 후 기존에 다니던 출판사에서 외주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런 인맥도 없으니 쉽지 않다. 출판사 취업부터 하자니 교정 교열은 어느 정도 되고 디자인도 신입으로서 배우면서 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 같지만 기획 쪽은 영 재능이 없어서 선뜻 나서지 못하겠다.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봐야지, 하고 서울시 기술교육원 디지털콘텐츠디자인과에 지원했다. Scribus를 통한 내지 편집 작업 및 Sigil을 통한 전자책 작업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대중적인 InDesign 사용법도 익혀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1인출판을 할 게 아닌 이상 어딘가에 취업을 한다면 InDesign을 사용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 외의 디자인툴도 언젠간 배워보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영역이다. InDesign은 사용해 보지 않았어도 Scribus로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Photoshop과 Illustrator에 대해서도 GIMP와 Inkscape를 조금 다룰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들 어설프게 독학을 했던 것뿐이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사전 지원 기간에 그렇게 지원해 버렸는데 마침 청년기지개센터에서도 사업 연계를 한다며 지원 시 접수 번호를 적어 내라고 해서 제출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받으면서 나아가는 게 좋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지난주에 면접을 보고 합격 발표가 나왔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기술교육원 수업을 들으러 다닐 예정이다. 혜화의 청년기지개센터 우리집 공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교육이 16시 20분에 끝나니 저녁에 따로 일정 잡고 만나는 게 아니면 7월 초까지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공부에 더 집중하게 되겠지. 다양한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사람 대하는 법도 많이 배웠고 해서 이제는 인간관계 측면에서의 미련은 별로 없긴 하다. 보통의 사회인들이 서로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네트워크 너머로만 상호작용하다가 가끔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처럼 우리도 결국 그렇게 나아가게 될 테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사이에 Photoshop은 조금 배우긴 했다. 지난가을, 두더집 커뮤니티에서 편집 디자인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재능 기부식으로 스터디를 진행하고 싶다는 분이 계셨다. 원래는 한 명만 과외를 해주시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늦게 봐서 그전에 먼저 응답한 사람이 있었다가, 늦게 확인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더니 추가로 받아주셨다. 내가 일경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는데 마침 스터디를 진행하시는 분이 일경험 기업이 있는 곳에서 몇 정거장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살고 계셔서 그 동네로 가서 스터디에 참여하는 데 큰 부담은 없었다. 기지개센터를 자꾸 무지개센터라고 부르시는 건 아무리 정정해도 안 고쳐지길래 그대로 뒀지만, 싫어한다고 했던 음식을 자꾸 권하는 건 조금 불편했다. 맨날 똑같은 걸 물어봐서 똑같이 대답하는 것도 지쳤고 일경험 프로그램이 끝나면서부터는 스터디만을 위해 그 동네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했다. 왕복 이동 시간이 순수 스터디 시간보다 길었다. 때로는 편도 이동 시간과 순수 스터디 시간이 비슷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나랑 상황 및 성향이 안 맞았을 뿐, 한 번 배운 게 있어서 기술교육원 다니며 기능을 익히는 데 좀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도움이 된 것 같아 감사한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한 명 모집한다고 했을 때 이미 응답한 이가 있으면 어쩔 수 없지 하며 포기했을 텐데, 아쉬움을 표하며 관심을 표하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더라. 좀 더 적극적으로 “저도 관심 있는데 혹시 추가로 안 될까요?” 하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 되고 싶기는 하다. 여러 모로 소극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분명 중학생 때쯤까지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다.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했으니. 둘이 아는 사이냐며 친구가 당황했을 때 그게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때만큼 나서는 건 좀 과한 것 같고, 그 중간 지점 어딘가를 찾고 싶다. 좀 더, 예전의 내 모습이 돌아오는 걸 느끼고 싶다.
요즘은 가끔씩 예전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긴 하다. 인간관계에서 겉돌고 소셜 미디어 속에서만 살아가기 이전의 모습말이다. 중학생 때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은, 고립감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 그것은 아주 가끔씩 나타나는 것이며 조울증처럼 평소와는 사뭇 다른 활동성을 보이곤 하는데, 이 또한 지원사업을 통해 여러 가지가 개선되며 나오기 시작한 긍정적인 효과인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 나아지다 보면 그렇게 되겠지 싶다가도, 때로는 그냥 내 상태의 편차가 커진 것 같기도 하고. 긍정적인 상태가 많이 개선된 만큼 부정적인 상태일 때는 또 하염없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나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요소를 파악하고 제대로 마주하며 극복해 나갈 필요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