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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약간의 용기

용기 내어 시도해 본 도전

by 단휘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취업은커녕 그 준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하고 싶었던 것들도 지난날의 흔적이 되어 어디론가 흩어진 채 사라져 버렸다. 확신에 찬 미래처럼 존재하던 것들은 이제는 그 어떤 감흥도 없는 언젠가의 기억이 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는 구체적인 방향성도 없이 흘러가는 녀석이 되어 버렸다. 할 줄 아는 것들도 그나마 관심 가는 분야도 모아놓고 보면 완전히 제각각이다. 선택과 집중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와서 그런가, 그 어떤 방향으로도 모이지 않는다. 뭐라도 해봐야지 싶다가도 그 어떤 분야를 선택하기에도 애매한 수준인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임으로 치면 스탯을 너무 골고루 분배해서 어느 직업으로도 전직하기 애매해진 잡캐에 가까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20대 중후반은 그 어느 분야로 특화하기에도 너무 늦지는 않은 시기이긴 한데, 그 분야가 도저히 정해지지 않는다.


규칙적인 생활과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면 정신적인 여유가 좀 생길 것 같다가도, 그래서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뭐라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약간의 의지까지는 생겼는데 무엇을 하면 좋을지 헤매고만 있었다. 청년이음센터에서 알게 되었던 청년 분들은 무슨무슨 인턴이니 청년도전지원사업이니 하며 각자의 길을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던 작년 여름, 왠지 내 소셜미디어 피드에는 미래내일 일경험에 대한 광고가 자주 보였다. 대체로 IT나 회계, 마케팅, 혹은 요식업 분야의 것들이라 나랑은 안 맞는다고 느꼈지만. 그러다 문득, 디지털 콘텐츠 분야의 일경험에 대한 광고를 마주쳤다. 이거라면 내가 그래도 조금쯤 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국디지털컨버전스협회에서 진행하는 미래내일 일경험 콘텐츠 제작 및 디자인 과정에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을 하고 나서도 걱정이 많았다. 내가 이걸 정말 할 수 있을까. 그냥 못 한다고 할까. 선정되면 청년기지개센터 프로그램 신청했던 것들 중 일부는 취소해야 하는데 그 프로그램들도 참여하고 싶다. 그냥 참여하던 프로그램이나 마저 참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만큼 용기 내서 도전한 것마저 그렇게 포기해 버리면 결국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사전직무교육 기간이 다가왔다. 일주일 동안 사전직무교육을 받으면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디지털 콘텐츠라는 게 크게 Premiere Pro와 After Effect를 이용한 영상 콘텐츠와 Photoshop과 Illustrator를 이용한 콘텐츠 디자인으로 나뉘는데, 내가 기대했던 건 후자지만 이곳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전자였다. 다른 참여자들도 대체로 자신의 영상 콘텐츠를 기획하여 촬영 및 연출 과정을 거쳐 편집을 하고 어떤 영상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끼며 기업 매칭 및 실제적인 일경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업 매칭이 안 되어 사전직무교육까지만 받고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참여 기업 목록을 보니 그래도 콘텐츠 디자인 직무를 수행할 청년을 원하는 기업도 있길래 그런 곳 위주로 1 지망부터 적어냈다. 참여 기업마다 업무 시간이 달랐는데, 이왕이면 오전에 고정적인 일정을 잡고 오후 시간을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전 근무 위주로 지원했다. 아무래도 오후 근무를 하게 되면 오전은 미적거리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랬는데 내가 적어낸 1-3 지망 기업과는 별개로 나는 13-18시에 근무하며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업체의 컨택을 받았다. 정확히는 오직 그곳에서만 면접 제안이 왔고 결국엔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영상 콘텐츠를 만들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만큼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릴 때 다른 영상 제작 소프트웨어를 잠깐 배워본 적은 있어도 Premier Pro는 Adobe 제품군을 사용해 본 경험은 없는 상태에서 사전직무교육으로 배운 게 전부였다. 그래도 거창한 기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기능만 다룰 줄 알면 되고 기술력보다는 정확성과 꼼꼼함이 필요한 작업이 많았는데, 띄어쓰기 두 칸 되어 있는 것을 잡아내던 녀석이라 다행히 그런 부분에서는 역량이 되었다. 사전직무교육 직전까지도 포기할까 싶었고 교육과 일경험 사이의 기업 매칭 기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떻게든 12주의 일경험이 끝났다. 본격적인 신입 사원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무경력자의 일경험이라는 걸 감안해서 일을 시켰겠지만 그래도 대충 한 사람 몫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엔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는데 말이다.


일경험이 끝난 후에는 서울둘레길 완주에 도전해 보았다. 사실 봄에 서울둘레길 코스가 개편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개편되고 나면 주말마다 한 코스씩 돌아볼까 생각만 하고 단 한 코스도 가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경험 때문에 지하철 많이 탄다고 기후동행카드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각 코스 시작 지점까지 이동하는 데 교통비 부담도 안 들었고, 그럭저럭 할 만해 보여서 뒤늦게 시작해 보았다. 하는 김에 손목닥터9988 챌린지에도 인증하고, 그냥 걸으면 심심하니 한창 유행이라던 피크민블룸도 설치해 보았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게임이었는데 어느새 레벨이 60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는 일경험 끝나고 추가 결제를 안 하려던 기후동행카드에 서울둘레길 돈다고 한 달 더 결제하긴 했지만 괜찮은 시간이었다. 서울둘레길은 12월 중순에 완주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피크민들과 꽃도 심을 겸 가볍게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이동을 위한 걷기 외에는 절대 따로 걸으러 나가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새삼, 하고 나면 별 것도 아닌 것들을 참 많이도 미루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많은 것들이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이겠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나아가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꽃을 심으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레벨이 올라 있는 피크민 블룸 같은 거 아닐까. 그저 멈추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막연해 보였던 지점에 도달해 있는 거다. 우리는 그저 걸어가면 된다. 가끔은 탐험을 보내거나 버섯을 잡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일들로 인해 단순히 걸어 나가는 것만으로는 안 될 수 있지만,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을 때 그것을 수행하고, 때로는 기다리며, 그렇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심각한 수준의 피크민 중독인 것 같다. 그래도 요즘은 PNF-404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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