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의 따뜻한 품

by 별바라기

우리가 할머니방에 매일 들러 주전부리도 하고 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도 듣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만, 해가 긴 여름날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산에 다녀오신 할머니는 점심에 잠깐의 낮잠을, 그리고 저녁엔 일찍 잠을 청하셨다. 할머니 방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백열등 그림자에 할머니가 앉아 계시는 모습이 비치지 않으면 이미 선잠을 주무시고 계시는가 보다 생각하여 할머니 방 문을 덥석덥석 열지 않았던 것이 우리 집 식구들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었다.


누구보다 이른 아침을 여시는 할머니는 수돗가에서 시멘트 바닥에 쇠로 된 세숫대야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시며 세수를 하시고 수돗가에 놓인 거울을 보시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숱 적은 긴 머리를 가는 빗으로 곱게 빗고, 한번 꾹 묶은 빙빙빙 돌리시고 둘둘둘 말아 올려 동그랗게 만드신 다음 은비녀를 쿡 하고 찔러 작은 주먹 사이즈의 머리카락 뭉치를 고정시키면 수돗가에서의 하루 일과 시작을 알리는 단장은 끝나셨다. 그리고 나선 어제 낮에 미리 뜯어다 이슬기를 말린 풀을 토끼장에 넣어 주시고 아침마다 화가 날 정도로 시끄럽게 울어대 잠을 깨우는 닭장의 닭들에게 어제 하루 모아 두었던 모이를 넣어 주셨다.


날마다 평안하면 좋겠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우리 사 남매는 항상 시끌벅적하였다. 그중 가장 사고뭉치는 나였는데, 비가 왔던 그날. 신작로 포장 공사하는 현장사무소는 비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자 사람들이 사무소를 비웠고 나와 동네 아이들 몇은 그걸 기회 삼아 현장사무소에 가서 놀기로 하였다. 엄마가 절대 가지 말라던 그 현장에 나는 어린 막내까지 데리고 놀러를 갔는데 어린 동생은 내가 한 눈 판 사이 고정되지 않은 유리창을 밟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이마를 크게 다쳤고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아빠는 빗길을 뚫고 동생을 데리고 보건지소에 가서 응급처치로 소독을 하고 왔고 꿰매려면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 당시엔 차가 없던 우리 집, 동생의 치료는 보건소 행으로 끝나야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동생을 잘못 봤다는 이유로 엄마한테 매를 맞았고, 안방에서 울며 나오고 있는데 마루에 있던 바로 밑에 동생이 그럴 줄 알았다고 한 그 한마디에 나는 냅다 동생에게 발길질을 했고 내가 장풍을 쏜 것도 아닌데 동생은 붕하고 날아가 비가 고인 마당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울던 나는 더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고, 마당에 떨어진 동생은 충격에 숨도 못 쉬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낀 엄마는 부엌에서 급히 나오셨고 그 어마한 광경을 보셨다.


엄마는 슈퍼우먼 같은 속도로 맨발로 마당에 내려가 동생을 끌어안았고, 눈은 나에게 꽂혀 있었다. 나는 순간 마루에서 마당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간을 육상선수가 허들을 넘듯 뛰어 달리기 시작했고, 해도 진 여름날의 빗속은 너무도 깜깜했지만 그냥 무조건 감을 이용해 앞만 보고 달렸다. 당장이라도 육상선수 출신의 엄마가 뒤에서 목덜미를 잡을 것 같은 공포에 뛰었는데 그때 뛰던 그 무거운 발걸음은 아직도 느낌이 생생하다. 나는 한참을 뛰다 발바닥이 아프다는 걸 느꼈고, 더 이상 맨발로는 움직이는 게 무리겠다 싶어 큰 길가에 있는 옥수수 밭으로 몸을 숨겼다.


조금 있으니 소리로만 들어도 다급하고 화가 난 듯한 발소리가 들렸고, 옥수숫대 사이로 보이는 실루엣이 우산을 든 엄마였다. 나는 엄마가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언니가 친구들과 우르르 버스에서 내렸고, 엄마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왔는지 아는 언니의 친구들은 언니한테 좋겠다는 인사를 남기며 각자의 집으로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후다닥 뛰어갔다.


아까부터 옥수수 잎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은 주르륵주르륵 계속해서 내 어깨 위로 떨어지고, 귀에는 모기가 계속 앵앵거리는데 찰싹 소리를 내면 엄마한테 잡힐까 봐 나는 천둥소리 같은 모기의 공격 소리를 꾹 참고 있었다. 그때 들려온 언니 목소리


"엄마 여기서 뭐해요?"


"너 둘째 못 봤니?"


"둘째 아직도 집에 안 왔어요? 비도 오는데 어디서 노느라고"


"아니다 들어가자"


둘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쪼그려 앉아 있으니 발도 저리고 발목까지 흙에 잠겨서 조금 더 있으면 엉덩이에도 흙이 묻을 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리를 펴고 도롯가로 나왔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온몸이 후끈한 거 같았다. 나는 빨래터에 가서 묻은 흙을 씻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불 꺼진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할머니 방문을 빼꼼하고 열자 잠귀 밝으신 할머니가


"거 누구나?"


"할머이 나여, 근데 조용히 해야 해. 나 엄마한테 잡히면 죽어"


"마한년 또 뭘 잘못한 거여"


나는 할머니가 누워계시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아 이 마한년 다 젖었네. 어서 이래 젖은 거여?"


할머니는 곁에 있던 수건을 끌어다 내 머리를 푹푹 닦아주시더니 방에 불을 켜시려 하셨다.


"할머이 불 키지마. 그럼 엄마가 올지도 몰라"


"그러길래 죄는 왜 짓고 다녀. 죄를 지으믄 안 되는 기여"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당신의 옷가지를 꺼내 입으라고 주셨고 철없는 나는 할머니의 몸빼바지와 셔츠를 입고 딱 맞는다고 소곤거렸고, 추위에 떨다가 긴장도 풀린 나는 그날 할머니 품에 안겨서 정말 따뜻하게 잘 잤다.


아침 닭 우는 소리와 새소리에 나는 잠이 깼고, 밤에 내가 방에 와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을 걱정했던 맘 착한 동생은 아침 일찍부터 이방 저 방 문을 열고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할머니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아는지 다행히도 할머니 방문은 열지 않았다. 밤 새 잠을 어찌나 얌전히 주무셨는지, 젖었던 곱슬머리 카락은 사자 갈기처럼 펼쳐져 있었고, 할머니 옷까지 입고 있던 나는 바깥 상황과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웃겨 입을 막고 낄낄거리자 그런 나를 보면서 할머니는 내 코를 잡아당기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내가 그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이미 알고 계셨었다. 할머니 방에서 대자로 뻗어 잠꼬대를 하고 있는 그 소리를 동생만 못 들은 것이었을까?...


"동생 때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아야 해, 나도 죽고 느그 엄마 아버지 죽고 나면 동기간 밖에 의지할 데가 없어. 언니가 최고고 동생이 최고여. 그래서 피붙이가 좋은 거여"


그날 할머니는 나에게 은밀하게 부탁하 듯 말씀하셨다.


언제가 동생에게 이 얘길 꺼낸 적이 있는데 동생도 이유는 모르지만 비 오는 마당에 떨어졌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상황을 설명하며 뒤늦은 사과를 했었는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미안하단 말로는 안될 만큼 내가 참 악랄했던 것 같다. 내일 날이 밝으면 동생에게 전화해 좋아하는 참치회라도 쏘겠다고 말해야겠다.


어린날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산소호흡기 같이 어린 나의 숨을 쉬게 해 주셨던 할머니의 고마운 마음을 이제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고 있으니... 이래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다고 하나보다.


비가 오는 밤과 빗소리를 들으면 가끔 그날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간다. 옥수숫대 사이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반딧불이의 그 무서웠던 빛, 유독 더 따뜻했던 구들장, 그리고 파스 냄새 가득한 할머니의 그 품이 생각이 난다. 오월의 밤공기가 참 좋은 오늘. 야나할머니가 정말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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