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산내음

by 별바라기

“한나 두울 세엣”


동생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뒷동산에서 가마니가 뒤꼍으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온다.


“언니야 또 간다아.”


동네를 지켜보듯 서있는 뒷동산 소나무 군락지. 그 옆에는 성황당도 있어서 어린 시절 우리들은 그곳에 귀신이 산다고 여겨 대낮에도 그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뒷동산에서 썰매를 탈 때도 성황당 앞으로 곧게 나 있는 편한 길을 두고 수풀을 헤치며 옆길로 빙 돌아갔고, 소나무에 매어 놓은 그네를 타러 갈 때도 성황당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행여나 그쪽을 바라보면 “퉤 퉤 퉤” 침을 뱉으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쫓았던 것 같다.


그 소나무 군락지에서 떨어지는 솔잎과 솔방울들은 양이 어마어마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가도 항상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늘도 할머니를 따라 동생들과 그 솔잎을 긁으러 올라갔고 고사리 같은 손이나 손이 여러 개 인지라 생각보다 작업이 일찍 끝났다. 할머니는 우리가 긁어모은 솔잎들을 포대에 담으시고 주둥이를 꼭꼭 동여 메셨다. 그리고 뒤꼍을 향해 포대 자루를 옮기셨다.


“언니야 이제 끝이야. 우리 내려간다.”


동생의 뿌듯한 목소리가 마당 안에 내려앉고, 마지막 포대자루가 데굴데굴 굴러 쿵하고 뒤꼍에 멈추면, 먼저 내려가 있던 나는 포대자루를 질질질 끌어다 할머니 방 군불 때는 곳으로 옮겨두면 들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혹여나 불이 옮겨 붙는 위험을 막기 위해 그 가마니들을 멀찌감치 쌓아 두셨다.


요즘 브런치에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면서 문득 나도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촌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산촌 생활이나 시골생활에 별로 기대도 없고 환상도 없는 나였다. 나는 좀 더 도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에 가게 될 일이 생기면 친구에게

“나 서울 왔어”라고 꼭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한다. 그러면 친구가 하는 말 “여보세요 아줌마 서울까지 삼십 분 걸리십니다.”


몸은 경기도민이나 아직까지 마음은 지방인으로 살고 있는 나인데, 이런 내가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혹시 산에 가지 않겠냐고 청한 나의 말에 남편은


“갑자기 웬일이야? 드디어 당신의 등산화가 흙을 영접하는 것인가?”


놀란 건지 놀리는 건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배낭을 챙겼다. 사실 경기도민으로 사는 20여 년 동안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 광교산이다. 그 동네 산에 가자고, 아이들과 남편이 죽기 전에 광교산 정상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맛을 봐야 한다며 여러 번 설득했었지만 나는 뼛속까지 산촌 사람이라, 소싯적에 너무 많은 등산을 했기에 필요 없다며, 최대한의 성의가 기껏해야 바람의 언덕을 찍고 오는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산에 먼저 가자고 하니 남편은 내가 변심이라도 할까 봐 후다닥 금 새 채비를 맞췄고 우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5월의 광교산.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손톱만 한 개복숭아와 들깨 씨앗 만하게 달린 도토리, 연하디 연한 연두색을 하고 막 깨어난 자벌레와 통통하게 살찐 이름 모를 애벌레들을 보면서


“이왕이면 새들에게 잡혀 먹지 말고, 나방 말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


라고 인사하며 남편의 뒤꿈치를 쫓았다. 그러다가 들려온 청아한 뻐꾸기 소리. 조금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내가 처음 경기도민이 되어 살기 시작했을 때 저녁 퇴근시간만 되면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도시에도 숲이 있으니 뻐꾸기가 우나보다. 그래도 타지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라도 들으니 좋네'라고 감탄했는데 희한하게도 그 뻐꾸기는 일 년 내내 우는 것이었다. 뻐꾸기는 아무리 늦어도 늦여름엔 울음을 그치는데 찬바람 씽씽 부는 겨울에도 울길래 ‘도시 뻐꾸기는 철도 모르나 보다’라고 혼자 웃던 찰나, 어느 날 아주 우연찮게 그 뻐꾸기 소리가 두부 파는 아저씨의 알림 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목골목을 돌며 집집마다 두부를 사라고 하는 뻐꾸기 울음소리. 나중에 이사를 하고 보니 그 동네는 뻐꾸기 소리 대신 딸랑딸랑 종소리로 두부 파는 소리를 알려주었다.


“와 저 나무들 너무 아깝다. 나무는 역시 장작이지. 구들장 뜨끈뜨끈한데 허리 좀 지지면 좋겠다.”


나이가 든 것인지, 장마에 넘어진 것인지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버섯이라도 자라고 굼벵이라도 먹을 테니 너무 걱정 마”라고 남편이 말했다.




가끔씩 차를 타고 가다 숯불구이집이나 가마솥 곰탕집에 쌓여있는 장작 가리를 본다. 나에게는 그 광경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묘한 만족감이 있다. 사실 이 만족감을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가족들과 첫 캠핑을 갔던 그 야영장. 불에 의존하는 맘이 컸었는지 몰라도 바짝 마른 장작을 챙겨 오는 그때에 느꼈던 넉넉했던 마음.


어린날, 가을 추수를 어느 정도 마치신 아버지는 해마다 꽤나 여러 날을 산에 가셔서 나무를 하셔서 지게에 지시고 큰 통나무를 끈에 묶어 산에서 내려오셨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기다렸고, 지게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달려가 힘을 합쳐 그 통나무를 마당으로 끌고 왔다. 아버지는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하고 장작을 패서 벽 한구석을 장작 가리로 채우셨는데, 톱질을 할 때 어린 우리들에게 통나무 끝에 앉으라는 임무를 주셨다. 우리는 적은 몸무게를 합쳐 통나무가 움직이는 것을 막았고, 슬근슬근 톱질의 움직임에 세 개의 작은 엉덩이가 씰룩씰룩 간지러워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놀이동산의 회전목마 못지않은 놀이기구였고, 대식구 겨울을 나기 위한 월동준비를 부지런히 준비하셨던 아버지의 마음도 꽤나 뿌듯하시고 만족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코가 기억하는 향이 점점 더 짙어진다. 깊은 산에 오르면 산에서 주는 특유의 향이 있다. 한창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와 등나무 꽃향기, 칡꽃 향기, 성냥 꽃 냄새도 좋지만 그 뭐랄까 어린 시절 맡았던 시원한 청량감 같은 것이 있다. 할머니를 따라 이른 봄 산에 올랐던 숲이 잠 깨는 냄새 같기도 하고, 쇠꼴을 베어지고 오시던 아버지의 지게 더미에서 나는 냄새도 있다.

꼭 산 정상을 찍으려고 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르다 보니 시루봉에 올랐다.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왕창 써서 그런지 다리도 아프다. 그런데 묘한 성취감이 있다. 그렇게까지 진통제에 의지하여 산에 오르셨던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르고, 할머니가 주워 오셨던 삐라 덕분에 파출소에서 한 움큼 받았던 볼펜 생각도 떠올랐다. 할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할머니 덕분에 나에게도 새로운 등산이란 취미가 생길 것 같고, 어쩌면 올해 건강검진에선 작년보단 성적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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