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닿을 듯 말 듯 한 인연
"동현아 책 관물대에 넣어놨다."
"감사합니다."
"새끼 뭐래. 둘이 있을 땐 형이라 하라니"
기석이 동현에게 조용히 말하자 동현이 주변을 쓱 살피고 대답했다.
"형하고 사촌인 거 알면 나를 형 프락치로 몰아 엄청 갈굴 거야. 그래서 절대 들키면 안 돼"
"근데 최 경장이 너한테 결국 그 일을 시키려고 지 컴퓨터에다 프로그램을 깔겠다는 거야?"
"뭔가 구린 게 있는 거 같은데 아직 거기까진 모르겠어. 일수 찍 듯이 딱지 떼오라고 할당을 주는 것도 그렇고 딱지 일련번호가 자꾸 안 맞아. 분명 뭔가 있다는 얘긴데"
'최 경장 이 새끼'
기석은 어금니를 물었다.
서점에서 엑셀 책을 살펴보던 미주는 곁에 선 의경이 지난번 횡단보도 사건 현장에 있었고 자신을 집으로 보내준 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우느라 명찰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세 명의 의경 중에 특히나 키가 큰 의경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었고, 그날 미리가 선아한테 이모집에서 술을 마시며 세 놈 중에 키 큰 놈이 젤 핸섬하고 젠틀한 거 봐서는 고참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지만 그날 제복에 놀란 탓인지 서점에서도 심박수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 이 시간에 집엘 다 오고? 어디 아파?"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미리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설마 땡땡이친 거야?"
"아니 땡땡이라니. 자 따라 해 봐 언니. 고상한 말로 조퇴"
"뭐래니? 그러니까 학생들이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에 왜 교사가 집에 있냐고?"
"아 참, 교사도 학교에 있기 싫을 때가 있다고. 그게 바로 오늘이고"
미리의 목소리가 여느 날과 다르게 날카롭게 들렸다.
"너 학교서 뭔 일 있었구나?"
아무 말도 않고 소파에 벌러덩 다시 눕던 미리가 팔뚝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나 오늘 학생한테 뺨 맞고 조퇴했어"
"어? 맞았다고? 어디 봐봐 괜찮아?"
미주가 놀라 미리의 양쪽 뺨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이고 그렇게 놀랄 정도 아니야. 내가 막아도 충분히 막았지. 그런데 어떡해. 분노조절 장애에다 요즘 조울증 약도 끊어서 미친년 널뛰듯 하는 애가 고집을 부려서 잔소리 좀 했더니 방어할 새도 없이 냅다 때리더라고. 그래서 대종상 받을 만큼의 연기를 하고 집에 왔지"
"진짜 너 괜찮아?"
"언니 괜찮아. 특수교사한테 이 정도는 폭행도 아니야. 내가 또 언니랑 다르게 소싯적부터 엄마한테 갈고닦은 맷집 하나는 끝내 주잖아"
미리의 넉살에 미주는 미리를 꼭 안아주었다.
"많이 아팠지? 저녁 맛있는 거 먹고 목욕 갈까?"
미주의 말에 미리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니 목욕은 됐고 주당 역 앞에 엄청 괜찮은 노래방이 생겼다는데 우리 저녁으로 간단하게 버거나 먹고 노래 부르러 갈까? 한 시간 끊으면 한 시간 더 준다던대"
"아, 아, 그럼 오늘 오래간만에 목구멍에 거미줄 좀 걷어볼까?"
미리가 내민 손바닥에 미주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둘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오늘 나 수경하고 박상경이랑 4소대 김이경하고 저녁 외출 달았더니만 너희들끼리 뭐 단합대회라도 하냐?"
최 경장이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기석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저와 박상경은 예정된 외출이었고 4소대 김이경 외출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각기 나가는 건데 밖에 나가서 만나겠다 뭐 그런 얘긴 거네"
기석은 말꼬리를 잡는 최경장이 거슬렸지만 아무 말 않고 서 있자 곁에 있던 찬하의 배를 손가락으로 툭툭치고 내반을 빠져나가며 중얼거렸다.
"소주는 내 손바닥 안이야. 알아서들 놀아"
기석은 최 경장의 말이 가시가 돋친 말인지 그냥 평소대로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좀 더 몸가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찬하와 경찰서 정문에 나가니 4소대 김이경이 베이지색 면바지에 푸른빛이 도는 셔츠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닙니다."
동현이 찬하의 눈치를 보며 힘 있게 대답했다.
"에이 새끼. 밖에서는 다나까 하지 말라니깐. 찬하야 너도 마찬가지다."
"에이 엉아 왜 구래요?"
찬하가 기석의 팔뚝에 매달리며 애교를 떨었다.
"야야 그렇다고 갑자기 목소리 성별을 바꾸는 이건 좀 아니지"
기석이 정색하니 찬하가 놀라
"예 시정하겠습니다." 말하며 다시 군기를 잡았다.
"아 녀석들. 농담도 못하겠네. 자 앞으로 2시간인 9시까지는 우리 계급장 떼고 그냥 형 동생이다 알았지"
기석이 웃으며 지나가던 택시에게 손을 흔들자 택시가 유턴해 와서 멈췄다.
"어디로 가십니까?"
"기사님 주당 역 2번 출구 앞으로 가 주십시오"
택시 기사가 앞자리에 앉은 기석과 뒷자리에 앉은 승객들을 백미러로 살피더니
"아. 의경들이시구먼. 외출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앞 좌석에 앉은 기석이 예의를 갖춰 말하자 기사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요즘 소주 경찰서 분위기는 어때요?" 소주에 뒷배를 불리는 경찰이 있다고 소문이 도는데 경찰서 안엔 아무 얘기 안 돕니까?"
기석이 해맑게 웃으며
"경찰서 밖에선 재밌는 이야기가 도나 봅니다. 저희는 안에서 매일 뺑이 치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기석이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갔지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김이경은 속으로 움찔하고 있었다.
"요새 우리 기사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도는 얘긴데 경찰들이 술집서 접대받고 딱지 끊는 척하면서 돈만 챙기고 한다는 얘기가 있어요. 의경들 시켜서 하루에 몇 장씩 할당을 채운다는 말도 있고. 나야 뭐 개인택시라 무리해서 일할 필요는 없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회사 기사들은 그렇게 딱지 떼이고 나면 사무실에 납부금 대고 기름값 대고 그러다 보면 밑지니깐 과속 안 할 수 없고 졸음운전 안 할 수도 없다니깐. 지난주에 갓 들어온 어린 친구 하나는 아침에 주당역서 앞 차 들이받아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 들어보니 깜빡 졸았다고 하드라고. 그날 밤새 운전하느라 잠을 두 시간도 못 잤대나"
택시 기사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탐정 같은 말투로 뱉어냈고 기석은 최 경장을 따라 출동했던 사고를 떠올리며 그날 안전벨트 미 착용으로 얼굴과 늑골 골절이 심각했던 운전자를 119에 실려 보냈던 것을 떠올리며 씁쓸해지던 찰나 주당 역 2번 출구 앞에 다다랐다.
"기사님 잘 타고 왔습니다. 안전 운전하십시오"
기석이 만 원짜리를 한 장 내밀자 택시 기사가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세려고 하고 있었다.
"잔돈은 넣어 두십시오"
기석이 정중하게 말하자 택시 기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본요금 밖에 안 나왔는데, 고맙습니다."
기석은 뒷자리에 박상경과 김이경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 목례를 한 뒤 앞 좌석 문을 닫았다.
"너희들 기사님이 한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김이경이 또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새끼 두 시간은 계급장 뗀다니깐"
"아, 그게"
"엉아 저는 지난번 사주셨던 불고기 버거 쎗뚜 또 사두대요"
박상경의 애교에 기석이 피식 웃었고 김이경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 버거집에 들어갔다.
그 시간 미주와 미리는 불고기버거 세트를 시켜 놓고 한참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때 기석의 일행이 버거집으로 들어왔지만 미주와 미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느라 기석 일행 입장을 눈치채지 못했고 기석만이 미주를 알아보고 흠칫 놀랐을 뿐이었다. 기석은 후임병들이 먹고 싶어 한 불고기버거 세트를 시키고 조용히 자리서 대기 중이었고 경찰서 식당 밥이 아닌 버거를 먹는다는 설렘에 박상경과 김이경은 땀이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비비며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냅킨을 가지러 다녀오던 미리가 기석과 눈이 마주쳤고 자리로 돌아와 미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언니 저번에 주당 역에서 만난 핸섬 하다 했던 의경 저 사람 맞지?"
워낙 눈썰미가 좋은 미리였기에 미주는 의심하지 않았고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았다.
"히야 역시 사람은 기럭지가 있고 봐야 해. 군복을 입혀놔도 멋지고 사복을 입혀놔도 멋지고. 오히려 사복 입혀 놓으니깐 훨씬 더 어려 보인다."
"워워 이 언니 또 막 나가네. 그렇게 크게 말하면 다 듣잖아. 제발 조용히 말해"
미주가 안절부절못하며 미리의 입에 감자튀김을 집어넣고 있었다.
"언니 케첩 안 찍었잖아. 케첩 많이"
미리의 장난에 미주는 웃고 말았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