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부자가 될 우리 둘째 손녀딸이 핵교 댕기 왔구나, 야야 니 방앗간에 좀 다녀올래?"
그렇지 우리 할머니가 나에게 '부자가 될' 이란 덕담을 하시는 걸 보니 분명 나에게 뭔가 아쉬운 게 있으신 게 분명한데 이것이 방앗간 행이었다.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할머니가 담아준 쌀이랑 수리취 나물을 다라에 담고선, 자전거 줄로 꽁꽁 묶고 3킬로 떨어진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에 도착하니 단오를 맞아, 가족의 생일을 맞아 떡을 하러 온 여러 동네에서 온 사람들의 안부 묻는 소리, 쌀이랑 취나물이 곱게 찧어지느라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소리, 시루에서 떡 쪄지는 김까지 더해져 시끄럽고 덥고 귀가 먹먹했다. 나는 벽으로 붙어 있는 기다란 나무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심심한 두발을 그네를 태우듯 왔다 갔다 하면서 아까부터 연신 줄줄줄 뽑아내는 초록색 절편의 끊임없는 기찻길 놀이를 보며 얼른 내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굽이굽이 방앗간을 채운 줄 선 고무다라 줄은 길었고, 내가 갖다 놓은 다라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줄을 서지 않았다.
시간은 점점 흘러 방앗간에 머물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줄어가기 시작했고, 떡 다라를 머리에 이고 옆구리에 끼면서 기다림의 끝을 만족해하는 표정,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갓 쪄낸 따뜻한 떡을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아줌마들의 싱글벙글한 표정들을 보며 나는 방앗간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된 것 마냥 가시는 분들 마다 안녕히 가시라 인사를 수없이 하다 보니 기계들은 하나 둘 멈추기 시작했고, 마지막 떡 뽑는 기계만 돌아가는데 드디어 마지막 손님인 내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골의 아스팔트는 중앙선도 없고, 도로와 인도의 구분도 없어서 차가 오지 않을 땐 죽을힘을 다해 도로로 달리다가 차가 오면 멈추거나 속도를 줄여서 자전거 운전을 해야 한다. 혹여나 무리해서 포장도로와 비포장 갓길 사이의 턱에 자전거 바퀴가 부딪히면 그대로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넘어지거나, 도랑으로 떨어지거나, 논두렁으로 쑤셔 박혀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유경험자인 나는 밤 운전이 근심이 되었다. 한참 전에 벽을 들이받아 부서진 자전거 라이트 자리를 쳐다보며 어두워지는 바깥을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내게
"딸네미 기다리느라 애썼어, 그런데 자전거에 싣고 갈 수 있겠어?"
방앗간 사장님의 안사람이자, 내 친구 엄마기도 한 아줌마가 어두워진 밖을 한 번 내다보시고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씩 웃어 보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아줌마는 초록색의 큰 덩어리를 절편 뽑아내는 기계에다 쿵 하고 올려놓으시더니 긴 떡을 커다란 가위로 잘라 내가 갖고 간 다라에 차곡차곡 담아주셨다.
희한도 하지 분명 집을 나설 때는 떡 다라가 이렇게 무겁진 않았었다. 그런데 자전거 페달을 아무리 힘껏 돌려도 뒤에서 누가 작정하고 잡아당기는 것처럼 자전거가 앞으로 나갈 생각을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둡기도 하고 밤에 라이트를 켜고 큰 소리를 내며 무섭게 달려오는 자동차에 잔뜩 겁을 먹은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걸려 도착한 집.
"야야 우째 이리 늦었나?"
마당에 들어서니 인기척을 느끼신 할머니가 나오시며 물으셨다.
"할머이 방앗간에 사람이 엄청 많아서 한참 기다렸다."
"부자가 될 우리 둘째 손녀딸 애썼다. 니 떡 마이 무라"
나는 이마에 송송 올라온 땀을 어둠에 숨기고 의기양양하게 자전거 뒷자리에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 실려 있는 떡 다라를 내려 부엌으로 들고 갔다.
"아이고야 우째나?"
떡을 본 할머니의 한마디.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광경
분명 방앗간 아줌마가 떡을 뽑아 줬을 때는 길쭉길쭉한 절편들이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지금 내가 본 떡은 약간의 절편의 떡판 모양 흔적만 남겨 있는, 아줌마가 절편을 뽑을 때 쿵하고 기계에 올려 두었던 초록색의 커다란 떡 덩어리였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눈물이 났고, 곧 밭에서 돌아오실 엄마와의 대면도 걱정이 되었다.
우는 내게 할머니는
"마한 노무 여편네가 짐이나 좀 빼고 지름칠이라도 마이해서 보낼 것이지, 아한테 보냈다고 걍 막 해 들려 보냈구먼, 니 잘못이 아니여. 울지 마"
나를 위로하셨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거기까지 다녀왔는데' 하는 억울한 맘과, 심부름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는 속상함에 할머니의 위로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방에 있던 동생에게 국수를 밀 때나 쓰는 달력 흰 종이를 후딱 마루에다 펴라 하시고 우리는 할머니가 국수를 하시려나 했는데 할머니는 국수를 만들 때 나 쓰시는 큰 나무 도마를 놓으신 뒤, 다라 안에서 점점 더 한 덩어리로 뭉쳐지고 있는 덩어리 떡을 칼로 쓱쓱 도려내시더니 요물 조물 길쭉한 모양을 만드셨다. 그리고 만두피를 밀 때처럼 뚝 뚝 썰어내셨고 콩가루 담아온 양푼에 떡을 한 개씩 넣어 우리에게 요래 요래 버무려서 차곡차곡 담아내라고 하셨다.
한 덩어리였던 수리취 절편은 할머니와 나와 동생들의 손을 거쳐 수리취 콩가루 무침 떡으로 다시 태어났고, 애당초 방앗간에서 만들어온 떡처럼 멋지게 변신을 했다.
그날 저녁 우린 떡을 맛있게 먹었고, 자전거 초보인 내가 힘들게 해 온 떡 덕분에 단오 맞이를 했다는 아빠의 칭찬에 나는 울고 속상했던 마음이 스르르 위로가 되었다.
가끔 내가 "인절미가 먹고 싶어"라는 말을 하면 남편이 묻는다.
"왜 어디 아파?"
희한하게도 나는 어딘가가 아프거나 아프려고 하면 콩고물에 버무려진 인절미를 찾는 습관이 있다. 몸에서 에너지가 필요하니 고칼로리의 음식이 당길 수도 있겠다지만 나는 나만의 '힐링푸드'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인절미 말고 다른 음식들도 찾지만 일순위가 콩고물인 것은 그 어린 시절, 접시 한가득 콩고물을 뒤집어쓰고 차곡차곡 쌓여있던 수리취 절편이 남겨준 결과가 아녔을까? 그런 추측도 해본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단오가 교과서에나 나오는 절기가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 동네 이웃들과 떡을 해서 나눠 먹던 정겹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도 어쩌다 절기를 맞춰 고향집에 가면 엄마는 수리취 나물을 뜯어다 예전에 먹던 그 맛의 떡을 해주시고, 가끔씩 아이스박스에 넣으셔서 택배로 보내주시기도 하는데 다행히도 엄마의 떡은 절대 덩어리가 아니며 콩고물은 봉다리에 담겨 덤으로 따라온다.
지금도 수리취 절편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그때는 떡을 먹어야 단오구나 알았었지만 이제는 이마로 쬐어지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할머니가 챙기셨던 단오라는 절기를 내 몸이 기억한다.
손에 만져지는 느낌은 마디마디 굳은살 가득한 할머니 손 같이 부드러움 하곤 거리가 먼 수리취 나물. 그러나 떡쌀과 증기를 만나서 부드럽고 향이 깊은 맛과 싱그러운 색을 내는 맛난 수리취 나물을 떠올리며 나도 가족과 이웃과 어우러져 맛있는 맛을, 색을 내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2022년 단옷날 아침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