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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가을과 겨울 사이

#8. 유자매의 독립 역사

by 별바라기 Feb 08. 2025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온 미주는 교통정리 중인 의경들이 있는지, 그 속에 키가 큰 의경이 있는지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며칠 동안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고 미주는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느껴졌다. '전역했나?' 어느 순간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집으로 향하는 미주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구둣발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고향슈퍼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2층집 아가씨네. 퇴근하는 길? 오늘은 무얼 줄까?"


"두부 한 모랑 콩나물 주세요."


아줌마는 비닐봉지를 건네며 미주에게 말했다.


"요 얼마 전에 길 건너 살던 아가씨가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해서 발정 난 놈한테 몹쓸 짓을 당했단 소리 들었어? 아가씨랑 동생도 문단속 잘하고 다녀"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미주는 계산을 마치고 슈퍼를 나왔다.




미리가 H대학에 합격하고 지낼 자취집을 구하러 부모님과 미주까지 함께 소주에서 새벽부터 올라와 구석구석에 있는 복덕방과 부동산을 찾아다니고 있던 날이었다. 미리는 학교 후문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이 좋겠다고 우겼지만 방 값도 너무 비싼 데다 엄마는 자칫하면 애들 우글거리는 소굴 되고, 본디 학교가 가까운 애들이 지각하는 법이라며 무조건 세정거장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 하는 수 없이 아빠는 차를 돌려 엄마가 원하는 동네로 향했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미리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빠 스톱! 스톱!"


운전하던 동철은 백미러로 미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이 깜짝이야 이번엔 또 ?"


"아빠 저 주당역이라고 이정표 있는 곳에서 우회전해 봐. 왠지 주당들만 모여사는 동네일 것 같고 이름부터 뭔가 끌리지 않아?"


"그러셔. 그래 뭐 네가 살집인데 네 감을 믿어보던지"


우회전을 하자마자 고향슈퍼란 간판이 보이자 엄마 인숙은


"여보 저기 고향슈퍼 앞에 차 좀 세워줘요 "


차에서 내려 슈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인숙보다 조금 더 나이가 어 보이는 주인이 나오며 물었다.


"베지밀 두병 하고 환타 두병 주시고 껌도 한 통 주세요"


슈퍼주인은 물건을 담아 건네며 인숙을 바라봤다.


"이 동네분은 아닌 것 같고 어디 들리러 오셨나 봐요"


"제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건 어떻게 아세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동네서 이렇게 장사하다 보니 무슨 신들린 사람 마냥 한 번 본 사람 얼굴이랑 목소리랑 기억하는 재주가 생겼지 뭐예요"


"아주 좋은 능력을 가지셨네요. 저는 그 반대 케이스랍니다. 호호호"


인숙의 웃음에 슈퍼 주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제가 하루 종일 여기만 지키고 있는 것 같아도 이 동네에 누가 들고 나는지, 어느 집에 고양이가 새끼를 몇 마리나 낳았는지 이번엔 누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는지 가만히 있어도 알게 된다니까요. 호호홍"


인숙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함께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이 근처에 믿을 만한 주인이 방을 내놨지도 아시겠어요?"


"아이고 말하면 입 아프고 말하면 잔소리죠. 집을 알아보시는 거예요? 이사 오시려고?"


"아니요. 제가 살게 아니라. 이번에 저희 아이가 H대학에 입학을 하거든요. 그래서 살 집을 알아보러 왔는데 내놓으라 하는 복덕방도 부동산도 다 다녀봐도 영 시원치 않아 속만 태우다 시원한 거 한 잔 마실까 하고 들렀어요"


"아이고 잘 오셨어요. 잘 오셨어. 아주 딱 맞게 오셨네. 그래 살 사람이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딸아이예요"


"어머나 어머나 딱이네 딱. 완전 어머니하고 따님하고 횡재한 거예요. 내가 엄청 잘 알고 친하게 지내는 형님이 1층 방이 비었다고 이왕이면 여자로 소개 좀 해달라고 한 게 어제인데 바로 이렇게 임자가 나타났네 나타났어. 어디 보자 형님 전화번호가"


인숙의 몇 마디에 슈퍼 주인은 들떠서 장부를 뒤지고 있었고 인숙은 잠깐 차에 다녀오겠노라고 차로 돌아왔다.


"엄마 마실 거 사러 간 거 아니었어? 공장에서 만들어 오는 줄"


미리가 구시렁 거리며 인숙에게 음료수가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


"복덕방 더 안 돌아도 집을 얻을 것 같아. 슈퍼에 들어간 나의 큰 계획이 예정대로 빛을 발하네. 호호홍"


인숙의 웃음에 아빠 동철은


"아이고 무슨 웃음을 그렇게 웃어. 소름 돋게"


"아니 이이가. 도시사람 슈퍼아줌마가 이렇게 웃습디다. 나도 흉내 좀 내봤어요. 호호홍"


어느새 환타를 따서 병째 한 모금 마시던 미리가 인숙의 말에 컥컥거리며 환타를 뿜었고 그 환타가 무릎에 튄 미주가 인상을 잔뜩 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네 식구가 슈퍼 앞에 서 있자 슈퍼 주인은 꽃무늬 조끼를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나왔고 이어 저쪽 골목에서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 한 분이 슈퍼 아줌마가 입은 색상만 다른 조끼에 긴치마를 입고 부지런히 오는 것이 보였다.


"형님 빨리도 나오셨네. 여기 이 분들이 방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진행하면 복비도 아끼고 힘도 덜 빼고 얼마나 좋아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렇죠?"


슈퍼 아줌마의 호들갑에 미리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히자 미주는 미리의 손을 잡는 척하면서 손을 꼭 쥐었다. 인상 풀라고. 그러자 미리가 웃음을 보이며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 이번에 대학생이 된다는 학생이 이 학생이군요. 축하해요. 그 옆에는 언니인가? 눈매가 많이 닮았네요"


"아 네 저희 여식들입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아빠고 여기가 엄마입니다."


"아휴 뭐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우리 그냥 우리 집서 살아요."


"아, 그래도 아직 집도 보지 않았고 조건도 말씀 안 하셨는데요" 인숙의 말억


"어머 내 정신 좀 봐. 내가 이렇다니까요. 먼저 집을 볼까요? 저기 보이는 저 집이에요" 집주인 아줌마가 웃으며 말했다.


집주인이 리네 가족을 안내하자 계약이 성사된 것과 다름없자 슈퍼 주인은 흥이 나서 말했다.


"형님 일 다 끝내고 음료수 마시러 와요"


"슈퍼 사장님 감사해요. 집보고 다시 들를게요."


인숙의 말에 슈퍼 아줌마가 함박웃음을 보이더니 슈퍼로 들어가는 손님을 보고 쏜살같이 들어갔다.




슈퍼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는 2층집 빨간 대문집은 겉보기에도 아담했고 관리가 잘 된 깔끔한 집이었다. 집주인의 정성이 스며있는 담장 밑의 많은 화분들은 야채를 길러 드신 듯했고, 작은 꽃밭엔 겨울을 난 앙상한 장미덩굴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빨간 벽돌로 된 2층 집은 2층엔 주인 가족들이 살고 있고 1층에는 방이 2개에 거실, 화장실과 벽장이 있다했다. 그리고 지하에도 사람이 사는 것 같았는데 비료포대에 파를 심어 놓은 것을 보니 살림을 잘하시는 분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층 방에 들어서니 주인을 잃고 비어 있던 방은 전 주인이 쓰던 향수 냄새가 느껴지며  썰렁했지만 형광등을 켜니 금세 환해졌고, 평소에 집 관리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깨끗한 방이라 미리는 방이 맘에 들었다.


"혹시 전세나 월세 중 어떤 걸 원하세요?"


"나한테 묻지 말고 엄마 생각을 말해 보세요. 제가 들어보고 절충을 할 수 있을지 말지 말할게요"


"음, 저희는 월세 말고 전세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집이 이렇게 좋아서 저희가 생각한 전세금으론 택도 없을 것 같아 고민이네요. 그리고 방 한 칸이면 되는데 2칸이라. 은 너무 맘에 들어요. 어쩌면 관리를 이렇게 잘하셨어요 호호홍"


"관리는요 무슨. 그럼 엄마는 전세금 얼마 생각하고 오셨어요?"


"지금 대학교 주변 살펴보니 오백에서 칠백 정도 왔다 갔다 하는 거 같은데 이왕이면 그 안에서 해결되면 저희야 감사하죠"


얘기를 듣고 있던 집주인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가 원래 시세대로 칠백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입자도 맘에 들고 가족들도 맘에 들어서 육백 어때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일 이 년 살고 나간다고 하기 없기예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쭉 우리 집에 산다는 조건!"


"혹시 제가 자퇴를 해도 이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래요. 무조건 4년 어때요?"


"넵! 좋습니다. 저를 4년 동안 잘 지켜 주세요."


미주의 넉살에 동철과 인숙은 어이없어 하고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는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미리네는 주인아주머니가 거래하는 복덕방에서 계약금을 주고 계약서를 쓴 다음 잔금은 입금을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 방을 구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슈퍼에 다시 들른 인숙은 귤 한 봉지와 맛동산을 사고 슈퍼 아주머니 손에 삼만 원을 쥐어 주고 슈퍼를 빠져나왔고, 슈퍼 아줌마는 손을 흔들며 미주 가족을 배웅했고 화주시로 향하는 동철의 차에는 안도와 피곤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엄마 뭔가 홀린 거 같아. 뭐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집을 얻고 가네"


"홀리긴 뭐가 홀려. 이게 다 하나님 은혜지. 엄마가 미리 집 놓고 얼마나 기도했다고. 주인아주머니도 사람 좋아 보이시지만 슈퍼 아주머니의 도움이 굉장했네. 참 재주가 특출한 분이야. 그런데 미리, 혼자서 잘 살 수 있겠어?"


"못살건 뭐야. 정 아쉬우면 같이 살 남정네를 구하면 되지"


앞 좌석에 앉아 귤을 까 동철의 입에 넣어주려던 인숙은 귤을 마구잡이로 입에 집어넣어 주고 뒤돌아 보며


"이 눔의 계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입술의 능력 몰라. 하고 많은 말들 중에"


"아이고 홍집사님. 그러는 집사님께서는 은쪽 같은 딸한테 계집애 라고 하세요?"


"음. 그건 미안. 근데 너 왜 금쪽도 아니고 은 쪽이야?"


"엄마한테 금쪽은 언니잖아"


"야 유미리.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걸고넘어져?"


귤을 먹던 미주가 팔로 미리의 목을 휘어 감았다.


"아 미안, 미안, 금쪽 미안. 아 아프다고 아 진짜 아파"


시끌벅적한 동철의 차는 화주시를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을 보고 있으니 미리는 가족 곁을 떠나 혼자 살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반면 미주는 한 방을 쓰며 티격태격하던 미리를 떠나보내고 혼자 방을 쓰게 된다는 것이 진짜 현실이 된 것 같아 서글퍼졌다. 그래서 얼른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잡으면 꼭 미리와 함께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고 도착해 보니 고향집 마당이었다.


일이 있던 것이 벌써 2년 전이 되었고, 미주의 바람대로 미리와 주당역 근처에 있는 집에서 살게 되는 꿈이 진짜로 실현되었다.




콩나물과 두부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슈퍼서 나온 미주는 집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멈춘 구둣발의 주인은 고대리였다. 미주가 나가자마자 복덕방 영감님 심부름이라며 성지다방 김양이 담배 한 보루를 청하자 슈퍼 주인 고향댁은 김양이 담배를 들고 복덕방으로 들어가는지 지켜보다 남의 집 대문벽에 몸을 숨기고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려다 말고 갑자기 든 소름은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미주가 가고 있던 방향이었기 때문이었다.


고향댁은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슈퍼 안에서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빨간 대문으로 미주가 들어갔는지 대문벽에 숨겼던 몸을 당당히 드러내 담배를 급하게 한 대 피더니 꽁초를 구둣발로 끄고 주당역 쪽으로 사라졌다.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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