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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천 Mar 20. 2023

스물다섯,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경험의 중요성에 관하여

  매너리즘 :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요즘의 내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복습을 하고 과제를 하고 저번 학기에 했던 알바를 다시 시작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가끔 친구들을 만나는, 이 반복되는 순환의 굴레가 뭔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엔 가끔 올리고 했던 수필도 거의 올리지 못했으며, 저번주에는 9개월 만에 최초로 독서 인증 회수를 채우지 못해서 독서 모임에서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나름 변화를 주려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풋살을 정기적으로 하기도 하고, 헬스장 이용 시간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거로는 부족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좀 더 큰 변화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 태권도부에 홀연히 가입했다. 그게 뭐가 큰 변화냐 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100명이 소속되어 있는 학교 중앙 동아리에 19학번 복학생이 혼자 들어가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적어도 나에게는) 왜 하필 태권도냐고 묻는다면, 현재 유산소를 소홀히 하고 있는 탓에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고, 그리고 과거 태권도를 재미있게 배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권도부의 운동 시간은 평일 오후 7시에서 9시이며, 크게 밥동(밥+운동)과 운동으로 나뉜다. 운동은 말 그대로 정해진 시간에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고, 밥동은 신청한 부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도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밥값이 회비로 지원되는 데다 사람들과 친해질 좋은 기회이니 시간만 되면 당연히 밥동을 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운동을 가게 된 오늘, 밥동을 신청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른 점이 있었다. 학생식당에 사람이 너무 많아 다같이 앉지 못하고, 2명씩 4명씩 떨어져 앉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나와 같이 앉게 된 분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분이셨다. 물론 온라인 멘토링 활동을 하면서 외국인 봉사자 분들과 대화해 본 적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외국인과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되었다. 


  그래도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영어가 잘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오신 분이라 간단한 자기소개를 불어로 하는 재롱(?)을 보여드렸다. 저번 학기에 들었던 프랑스어 초급 강좌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김치와 양파절임, 미역국을 다 비우셨길래 여쭤보니,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 청국장과 김치란다. 느끼할 때 김치를 먹으면 그렇게 좋다는데, 순간 국적을 의심할 뻔했다.


  운동은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오랜만이라 동작들이 다소 낯설긴 했지만,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써서 무리가 간다든가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파트너를 바꿔가며 스텝이나 발차기 등 여러 기본 동작들을 연습했는데, 다 같이 힘들어서 그런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운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단지 22,23학번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서 좀 걱정은 되었다.


  운동이 끝나고 아까 그 분과 우연히 가는 길이 겹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수요일'이 일, 이, 삼이나 하나, 둘, 셋처럼 숫자를 지칭하는 말이냐고 물어보시길래 불어의 'lundi'(월), 'mardi'(화), 'mercredi'(수)처럼 요일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알려주었다. 또다시 숫자를 안 외워도 된다니 너무 다행이라는 말에 빵 터지고 말았다. 나도 불어에는 대체 왜 명사에도 성별이 있는 거냐며 어려움을 토로하다 보니 어느덧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낯선 사람과 이렇게 즐겁게 대화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성별도 국적도 다른 사람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통해 느낀 건, 경험이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온라인 멘토링을 하고 프랑스어 강좌를 수강했던 덕 외국인 분과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고, 풋살과 헬스로 단련된 하체는 태권도의 높은 훈련 강도를 버텨주었다.(내일의 나도 버텨주리라 믿는다.) 내 일상과는 무관해 보이던 활동들이 도움이 된 것이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었는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나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해 나가야겠다. 목표는 우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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