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기회를 얻다 (13)

남이는 귀성군이 내놓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기뻐할 수만 없었다

by 두류산

30장


유자광은 사대에 올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확인하고 화살을 날렸다.

유자광은 평소에는 십에 아홉의 화살을 과녁에 맞히지만, 이 날은 바람 방향의 예측이 어려워, 가까스로 다섯 발을 과녁에 적중하였다.

남이가 활터에서 내려오는 유자광을 보고 농을 던졌다.

"유 참지의 활 실력은 전쟁터가 더 나은 듯하네.”

"공중 바람이 생각보다 심합니다. 염두에 두십시오.”


남이의 차례가 되자 세조는 그의 활 쏘는 솜씨를 익히 아는 터라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이름을 떨쳤고, 한명회와 함께 세조 즉위의 1등 공신인 좌의정 권람이 점찍어 권세가의 사위가 되었다. 남이의 할머니는 세종대왕의 누이인 정선 공주이니, 세조에게는 남이가 조카였다.

언젠가 명나라의 사신 강옥이 남이가 활 쏘는 모습을 보고 세조에게 ‘이런 좋은 장수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니 전하께서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말했을 정도로 남이는 활쏘기와 무예에 능했다.


남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를 의식하며 기세 좋게 활시위를 당겨, 빠르게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힘차게 날아가다가 과녁에 다가가면서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와 왼쪽으로 꺾였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아쉬워했다.

남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펄럭이는 깃발을 살펴, 의도적으로 과녁의 오른쪽을 겨냥했다. 이번에는 순간적으로 바람이 잦아들면서 그대로 과녁 오른쪽으로 화살이 떨어졌다. 또 한 번의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남이는 임금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는 터라 평정심을 잃었다. 평소대로 멋지게 과녁의 중앙을 맞히며 바로 만회하려고 활에 화살을 급히 채웠다. 활을 최대한 당겨 빠르게 화살을 날렸으나, 이번에도 과녁을 벗어났다. 남이는 계속 화살을 날렸으나 한 발도 과녁에 적중을 시키지 못했다.


남이는 활을 내팽개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얼굴이 붉어진 채 활터에서 내려왔다.

남이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칼을 쓰는데 능해 예사로 문신들은 물론 무인들마저 조롱하고 다녔는데 여러 사람들이 속으로 비웃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조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 남이를 보고 웃으며 놀렸다.

"야인(野人)을 호령하던 남이의 기상은 어디에 두고 왔는가?”

임금의 놀리는 말에 남이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이시애 토벌 때 활로 공을 세웠던 참판 이숙기가 사대(射臺)에 올라섰다. 이숙기가 쏜 화살은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관중(貫中)이오!”

과녁에 적중했다고 깃발을 흔들며 외치는 군사의 목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세조의 칭찬 소리에 남이는 상기된 얼굴로 힘을 주어 어금니를 물었다.


이숙기는 이날의 최고 궁수가 되어 임금이 하사하는 말을 상으로 받았다.

활쏘기 시합이 끝나자, 임금은 세자에게 지시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문무백관에게 술을 내리고 즐기게 하였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이가 취하여 비틀거리며 임금 앞에 나왔다. 남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세조에게 따졌다.

"성상께서 귀성군 이준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이는 잘못이라 신은 여깁니다.”

신하들은 남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웅성거렸다. 훈구대신들은 남이를 비난했다.

"저런 못된 자가 있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신하들의 눈길이 모두 남이와 임금에게 향했다. 세자도 남이의 경망스러운 태도에 눈살을 찌푸리며 부왕의 눈치를 살폈다.


세조는 낯빛이 변해 남이를 노려보고 소리쳤다.

"감히 과인을 잘못했다고 나무라는 것이냐?”

임금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꾸짖자, 신하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귀성은 종친이고 또 큰 공이 있으니, 귀성을 아끼지 아니하고 누구를 아끼겠느냐? 너의 말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함께 이런 불충한 말을 하고 다녔느냐?”

남이가 정신이 번쩍 들어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세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목소리로 명하였다.

"남이를 당장 끌어내어 의금부의 옥에 가두어라!”

내금위 군사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남이의 양팔을 제압하고 목을 누른 채로 끌고 나갔다.

유자광은 남이를 높게 보았으나, 하늘같이 생각하는 세조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하여 수모를 당하며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


세조는 이시애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남이와 함께 적개공신 일등이 된 이숙기를 보고 물었다.

"남이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

"심히 옳지 못합니다.”

임금이 무장들에게 크게 소리쳐 물었다.

"너희 장수들도 남이와 함께 이와 같은 말을 하고 다녔느냐?”

신(新) 공신들과 무장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숙기가 무장들을 대신하여 얼른 대답하였다.

"신들이 어찌 남이처럼 망령된 말을 하고 다녔겠습니까?”

임금은 유자광에게 물었다.

"남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자광은 바로 대답하였다

"심히 옳지 못합니다.”


임금이 옆에 있는 승지 어세겸을 돌아보고 물었다,

"남이의 말이 합당한 말이냐?”

어세겸은 임금이 남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임금의 기분을 살피며 묻는 뜻을 살피려고 우물쭈물 대답을 속히 못했다.

세조는 노기를 띠며 말했다

"어세겸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더니, 승지가 된 이후부터는 그 옳음을 보지 못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둘러보며 탄식했다.

"과인이 세종 때의 승지를 겪어 보았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승정원이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연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세조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귀성군 이준에게 술을 내리고 일어나 춤을 추게 하며, 흥가락을 읊었다.

"누가 대장군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천하를 평정하였는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천하의 인물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큰 공을 세웠는가? 귀성군이로다.”

기생들은 임금의 흥가락을 받아 그대로 노랫가락으로 부르며 흥을 돋우었다.

임금은 한명회에게 술을 내리고, 흥가락을 읊었다.

"누가 제일 으뜸가는 공신(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옛 공신(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 공신(新勳)인가? 귀성군이로다.”

기생들은 임금의 말을 그대로 노랫가락으로 부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임금은 영순군 이부에게 술을 내려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웃으며 소리쳤다.

"누가 공이 없는 무훈(無勳)인가? 영순군이로다.”

기생들이 임금의 말을 받아 노래를 부르니, 그제야 문무백관들도 긴장이 풀려 웃고 즐겼다.


세조는 남이의 무례한 행동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옥에서 석방시켰다.

옥에서 나온 남이를 무장들이 위로하니 남이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내가 틀린 말은 하지 않았소. 그러니 내게 무슨 죄가 있겠소.”

남이의 말에 듣는 자들이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세조는 귀성군을 영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귀성군과 남이는 동갑으로 둘 다 28세였다. 28세의 영의정은 조선 개국 이후 최연소 영의정의 탄생이었다. 한명회와 김국광 등 구공신들은 신 공신들이 조정의 요직들을 차지하자 긴장했다.

남이는 귀성군이 내놓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기뻐할 수만 없었다.





선비의 나라는 브런치북 2권( https://brunch.co.kr/brunchbook/yubok4 )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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