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장원급제를 하여, 병조정랑에서 정 3품 병조참지로 승진하였다
세조는 유자광이 예상외로 조정에 일찍 복귀하자 크게 기뻐하였다. 유자광을 다시 병조정랑에 임명하고, 별도로 총통군의 훈련과 지휘도 맡겼다.
세조 14년 1월, 피부병이 심해진 세조는 정희왕후와 더불어 세자를 거느리고 온천 치료차 온양으로 거동하였다. 거동 행차는 보성군 이합을 좌상대장으로, 공조판서 남이를 후상대장으로, 평성도정 이위를 내금위장으로, 유자광을 총통장으로 삼아 호위하게 하였다. 온양 행궁(行宮) 행차에 신숙주와 조정의 주요 대신들도 따라나섰다.
어가(御駕)가 살곶이(지금의 서울 행당동 지역)에 이르니, 경기관찰사와 절도사가 맞이하고, 백관들은 삼전도까지 배웅하였다. 유자광은 그동안 훈련시켜온 총통군을 어가행렬의 양쪽에 호위하게 하여 행차를 더욱 장엄하게 하면서도 임금의 온양행궁 행차를 효과적으로 경호하였다.
세조는 온양행궁에서 온천요양을 하면서, 예조와 병조에 별시(別試) 문무과를 치를 것을 지시하였다.
임금이 가까이에 있는 유자광에게 물었다.
"이번 별시 무과에 너도 응시하려느냐?”
"전하, 저는 문과에 응시하고자 합니다.”
세조는 유자광의 뜻밖의 말에 놀라 물었다.
"문과에 응시한다? 문무를 겸비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렷다. 뜻이 장하기는 한데, 과연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 두고 보겠다.”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오를 때, ‘천출이다’, ‘과거 급제자가 아니다’하며 반대가 많았고, 병조에서도 관리들이 자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다. 유자광은 무인들이 치르는 무과보다는 선비들이 중시하는 문과를 응시해서 자신의 학문도 만만치 않음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은 성황리에 모두 마쳤다.
과거시험을 주관한 신숙주와 시험관들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채점에 들어갔다. 시험관들이 합격 가능한 답안지를 올린 것을 신숙주가 최종적으로 당락(當落)을 정하고 등수를 결정하였다. 시험관이 한 시험 답안을 들고 신숙주에게 물었다.
"이 답안은 대책은 우수하나, 중국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고어(古語)를 쓴 데다 어법도 다듬어지지 않았는데 낙방과 합격, 어느 쪽으로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숙주가 답안을 받아서 읽어보고 낙방으로 결정했다.
"역사 지식은 상당한 것으로 보이나, 제대로 공부한 사람의 답안은 아닌 것으로 보이네.”
신숙주는 채점을 완료하고, 합격자 명단과 장원에서 3등까지의 과거 답안을 임금에게 올렸다.
세조가 문과 급제자 명단을 보니 유자광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유자광이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 결과적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호기심이 생겼다. 유자광이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여 신숙주에게 명했다.
“유자광의 답안을 올려라.”
신숙주가 올린 유자광의 답안을 세조가 읽어보니 시험에서 물은 대책에 대한 해결책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1등부터 3등까지의 답안을 받아서 읽어보니 문장은 유려했으나 대책은 유자광이 제시한 것만큼 깊이가 없고 대개 탁상공론으로 실현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임금이 읽기를 마친 후 신숙주에게 유자광의 답안을 내려주며 물었다.
"과인이 보기에는 이 답안의 대책이 좋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합격시키지 않았느냐?”
"대책 속에 고어(古語)를 많이 쓴 데다 어법 또한 지키지 않아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신숙주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록 고어를 썼다 하더라도 묻는 본뜻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신숙주와 시험관들은 다시 상의하여, 유자광을 문과 장원으로 올렸다.
유자광은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를 받고, 어사화 두 가닥을 머리에 꽂고, 임금이 내리는 술잔을 받았다. 유자광은 답례로 임금께 절하며 가슴으로 아뢰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정의 신하들과 만천하 백성들이 주상전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자광은 벼슬을 가진 채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므로 관례대로 특별 승급이 되었다. 세조는 즉석에서 유자광을 정 5품 병조정랑에서 정 3품 병조참지로 승진 임명하였다.
이로써 유자광은 갑사 신분에서 일 년도 안 되어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당상관은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대청(堂)에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를 가리키는 데서 나온 말로, 국왕과 같은 자리에서 조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정 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문신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무신들은 평소 문신들이 문과와 무과를 차별하고 있던 터라 유자광에게 와서 문과 장원급제와 승진을 함께 축하하였다.
사관은 이날의 일을 생생하게 실록에 남겼다.
"유자광은 첩의 아들이나 허통이 되어 과거 시험에 나갈 수 있게 하고, 또 특별히 장원으로 급제시키고 즉시 병조참지를 제수하니, 조정이 자못 놀라워하였다.”
유자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참지로 승진하자, 병조에서도 겉으로만 복종하던 태도를 바꾸어 마음속으로 따르는 관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468년 세조 14년 5월 1일, 활쏘기 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유자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말을 달려 가까운 활터에 가서 날씨를 점검하며 활을 시험해 보았다. 바람이 꽤 세차게 불어 과녁을 조준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세조는 경복궁 후원에 있는 서현정에 나아가 말 한 필을 상품으로 걸고, 활쏘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먼저 병조판서 귀성군 이준이 활터의 사대(射臺)에 올랐다. 세조는 사대에 오른 귀성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귀성군의 부친은 세종대왕의 4남으로 임영대군이었다. 세조는 동생인 임영대군이 안평대군이나 금성대군과 달리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아 특별히 좋아했고, 아들인 귀성군도 아끼고 사랑했다. 세조는 귀성군이 도총사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우자, 오위 도총관에 제수하였다가 곧이어 병조판서로 올려주었다.
귀성군이 화살을 날렸으나 연속해서 세 발이 과녁에서 벗어났다. 세찬 바람 탓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공조판서 남이는 귀성군을 비웃었다.
"귀성군은 주상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라는 것 외는 보여줄 것이 없는 게야.”
귀성군은 가까스로 두 발을 과녁에 맞히고 활터에서 내려왔다.
남이는 옆에 있는 병조참지 유자광을 돌아보며 말했다.
"막중한 군권을 맡고 있는 병조판서가 겨우 두 발 명중이라니, 어찌 군사들이 마음으로 따르겠는가?”
유자광은 남이의 말에 동조하기도 애매하여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예측하기 힘든 바람을 살피던 유자광은 차례가 되자 사대에 올랐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