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4)

임사홍은 임금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신하가 되리라 다짐했다

by 두류산

4장


집의 김계창은 대사헌 김지경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박시형을 꾸짖었다.

“의논하여 뜻을 모아 아뢰어야지, 어찌 단독으로 그리 말하였는가?”

장령 배맹후도 마른침을 삼키며, 김지경과 김계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원상들은 반드시 우리들이 함께 의논하여 임금에게 아뢰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박시형은 그들의 모습이 한심하여 속으로 탄식하였다.

‘어찌 대간이 되어 주상에게 직언(直言)을 하려고 하지는 않고, 오로지 권세 있는 대신을 거스르지 않으려고만 하는가.’


김지경은 생각에 잠겨있는 박 지평을 보고 소리쳤다

“이처럼 큰일을 본부에서 의논도 하지 않고 단독으로 말하였는가?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제가 홀로 아뢴 바이니, 저 혼자 책임을 지고 본부에는 피해가 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지경은 박시형이 스스로 책임진다고 선언하니 무안하여 다시 나무랐다.

“원상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제도이다. 옛적부터 비록 장성한 임금이라도 반드시 경험이 많은 원로대신에게 자문하였다. 주상께서 즉위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연히 대신들에게 자문하여야 할 것인데, 박지평이 원상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경솔한 일이다.”


김계창이 대사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경연은 일을 아뢰는 곳이 아닌데, 그런 말을 아뢴 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원상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인데, 비록 삼 년이 경과되었다 하더라도 폐지하자고 말한 것은 두 번째 잘못이다.”

사헌부 최고위 관리들인 김지경, 김계창과 배맹후는 모두 한 뜻으로 박시형을 압박했다.

“원상들에게 만약 이 말이 전해지면 반드시 스스로 사직하기를 청할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박 지평이 잘못을 빌어야 할 것이야.”


박시형은 그들이 한심스러웠다.

‘대사헌과 집의, 장령이 모두 원상들을 두려워하여 이같이 비루한 말을 쏟아내니, 사헌부의 젊은 관리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한명회는 조정의 젊은 대간이 노골적으로 원상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괘씸하였다.

“박시형이라고 했나? 하룻강아지가 감히......”

한명회는 원상들을 대표하여 임금과 대왕대비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박시형이 비록 명백히 말하지는 아니하였으나, 그의 뜻은 원로대신들이 비록 승정원에 앉아서 일을 본다고 하더라도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들은 청컨대 사직하기를 원하옵니다.”


한명회는 임금과 함께 섭정을 하고 있는 대왕대비를 보며 말했다.

“옛적에는 원상 제도가 없었으나, 세조 때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신(臣) 한명회와 구치관에게 명하여 승정원에서 정사(政事)를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대로 두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신들은 일찍이 사직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신들이 게을러서 그만둔다고 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사직을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정희대비는 한명회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나이 어리시고 나도 아는 것이 없으므로 원상들이 보필하는 힘에 의지하고 있는데, 사헌부에서 괜한 말을 하여 경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마세요.”


한명회와 원상들이 박시형이 경연에서 아뢴 말을 듣고 사직을 청했고, 대왕대비가 극구 말렸다는 소식이 사헌부에도 전해졌다.

대사헌 김지경은 탁상을 내리치며 박시형을 나무랐다.

“박 지평은 왜 미리 해명을 하지 않았는가. 사전에 죄를 빌어 이런 사태를 막았어야지.”


박시형은 급히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경연에서 신이 원상을 폐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이 일은 사헌부 전체와 더불어 의논하여 아뢴 것이 아닙니다. 물러나와 생각해보니 실로 잘못되었습니다. 청컨대 신을 처벌하여 주소서.”

"사람마다 각각 생각이 있으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죄를 묻겠느냐?”


박시형이 사헌부에 돌아가서 임금에게 벌주기를 청하였으나 죄를 묻지 않았다고 보고하니 대사헌은 더욱 좌불안석이었다.

“원상들은 반드시 우리 모두가 의논한 것으로 알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사헌부 집의와 장령이 박시형을 다그쳤다.

“박 지평이 홀로 아뢴 죄를 안 받았으니, 원상들은 반드시 사헌부 전체에게 혐의를 둘 것이다. 이 일을 어찌 해결할 것인가?”

“오늘은 이미 어두워졌으니, 내일 확실히 죄를 받겠습니다.”

다음날 박시형은 다시 임금을 찾아 사직을 청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다.


박시형이 대사헌과 집의, 장령의 핍박으로 결국 사헌부를 떠나게 되자 본부 감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이 분노하였다. 그들은 지평 김이정(金利貞)에게 몰려와 불평을 터뜨렸다.

“박 지평이 임금에게 고한 것을 꾸짖어 사직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사헌부를 망신시켜도 되는 겁니까?”

사헌부 감찰들은 사헌부 고위관리들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등청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지평 김이정이 박시형의 사직에 대해 시비를 가려줄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

"박시형이 즉시 해명하지 아니한 것도 잘못이지만, 본부에서 박시형을 꾸짖어 피혐(避嫌)하게 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부디 옳고 그름을 가려주기를 청하옵니다.”

피혐은 잘못이나 죄과에 대해 탄핵을 받은 벼슬아치가 벼슬을 유지하는 것을 피하던 일을 말한다. 조정의 관리들은 대간들에게 탄핵을 당하면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숙주가 나서서 아뢰었다.

"사헌부에서 이것으로 인하여 모두 등청하지 아니하니, 불가불 속히 시비를 가려야 하겠습니다.”

임금은 대사헌과 사헌부 관리들을 불렀다. 대사헌 김지경이 임금에게 변명하였다.

"원상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인데, 박시형이 폐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주상께서는 분명 본부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생각하실 것이며, 또한 반드시 불가하다고 할 것이므로, 박시형으로 하여금 먼저 피혐하게 하였습니다.”


성종은 김지경과 김계창 등이 대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목소리를 높여 명하였다.

"김지경과 김계창 등도 아울러 교체하도록 하라.”

이로써 지평 박시형이 원상제를 폐지하자고 제의하였다가 당사자는 물론 대사헌, 집의, 장령 등 사헌부의 주요 관리들이 모두 좌천하여 사헌부를 떠나게 되었다. 임금은 박시형의 기개를 좋게 보아, 곧바로 예문관 수찬 겸 경연관으로 임명하여 가까이 두었다.


땅거미가 지자 여름 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종은 마음이 허전하였다. 대왕대비가 먼저 일어나 이미 대비전으로 갔는데도 어전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환관 이원례가 임금의 마음을 알고 가만히 옆에서 대기하였다. 임금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언제까지 원상제가 필요한 것인가.....”

이원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세월은 전하의 편입니다.”

임금은 이원례의 말을 새기며 말없이 내전으로 향했다.


성종은 사헌부 대사헌에 권감, 집의에 민정, 장령에 이맹현을 새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사간원은 민정(閔貞)이 대관(臺官)에 합당하지 않다고 탄핵을 하였다.

“민정은 조부가 재산을 많이 물려주고 죽으니, 자손들이 다투어 송사를 하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재판에 나와 서로 욕을 퍼부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의금부가 조사에 나섰고, 그 결과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직되었으니 관리를 규찰하는 대관의 직책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실망하며 명했다.

"당초에 어찌하여 민정을 추천하였느냐? 속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라.”


성종은 민정의 자리인 사헌부 집의에 임사홍을 낙점하였다. 임사홍은 오랫동안 바라던 대간의 자리로 가게 되어 고기가 물을 만난 기분이었다.

임사홍이 본가에 들렀더니 임원준은 기뻐하며 말했다.

“주상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임금이 아니다. 대왕대비의 생각은 다르지만 점점 원상들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는듯하다. 기회를 보아 원상제 폐지를 다시 거론한다면, 너에게 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원상제 폐지를 주장하다가 박시형은 물론 사헌부 주요 관리들이 모두 좌천을 당했습니다. 당분간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임원준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조정에서는 김지경, 김계창과 배맹후를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눈과 귀를 가린 사람들이었다고 욕하고 있다. 더구나 박시형도 사헌부에서 직을 내놓긴 했지만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경연관을 겸한 예문관 수찬으로 임명했으니, 어찌 좌천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네요.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꺼낸 박시형을 주상께서 평가하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주상께서 기개 있는 대간을 키워 대신들을 견제하고 싶으신 것이다. 너의 자질을 보시고 사헌부에 낙점하셨을 터이니 주상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임사홍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입지전적인 분이시다. 젊었을 때 과거시험장에서의 부정사건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12년을 기다린 후 과거에 급제하여 기사회생하지 않으셨는가.’

임원준은 이어서 말했다.

“너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임을 명심해라. 대왕대비도, 주상도 너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주상은 너를 미래의 재상 감으로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임원준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주상이 너에 대해 가지는 기대를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임사홍은 본가를 나오면서 이미 어두워진 궁궐 쪽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든 주상이 조정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신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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