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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Oct 06. 2023

남이 장군은 참으로 억울하게 죽었을까?

 영웅의 죽음


 1468년 예종 즉위년 10월 27일, 임금은 역모를 일으킨 남이와 강순 등을 저자에서 환열(轘裂)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명하였다. 환열은 거열(車裂)이라고도 하며,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서 끌어당겨서 인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었다. 효수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을 말했다. 예종은 교서(敎書)를 내려 역모를 사전에 막은 것을 기뻐하며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남이와 강순 등은 군기감(軍器監,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 앞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한 후 이들의 머리가 이레 동안 효수되었다. 

 백성들은 전쟁 영웅 남이 장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했다.

 "남이장군은 역적 이시애를 토벌하였고, 여진족을 물리친 조선 최고의 호걸이 아닌가. 명문가 출신에다 전쟁 영웅으로 나이도 젊어 앞길이 구만리인데, 뭐가 답답해서 역모를 했겠어? 이건 틀림없이 무고야.”

 "노비의 자식인 유자광이란 놈이 자신이 모시던 남이장군을 언감생심 시기하여 이 지경이 된 게지.”

 "상놈이 더러운 입으로 나라의 영웅호걸을 능멸하고 절단을 내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백성들은 영웅으로 환호했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죽음이 천출인 유자광의 고발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유자광은 양반 아버지와 노비 신분의 어머니가 낳은 얼자(孼子)였다. 서자(庶子)는 양반 아버지와 일반 백성인 양인(良人)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는데, 서자와 얼자를 합해서 서얼(庶孼)이라고 했다. 서얼은 양반 사회에서 무시를 당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 신분상의 제약이 많았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담아 야사(野史)는 남이가 유자광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도 남이를 죄가 없는 데 억울하게 죽은 비극적 영웅으로 여겼고, 조선의 무속인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으로 남이장군을 신으로 모셨다.


 과연 남이 장군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남이의 역모사건은 명백히 실패한 반란이었다. 

 훗날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수많은 선비들이 죽게 되자 사림들은 그를 극악무도한 간신으로 욕하였다. 김종직의 제자 남곤은 수많은 동문들을 죽게 한 유자광에게 원한을 가지고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집필하여 후세에 남겼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野史)는 이런 영향을 받아, 남이의 역모사건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를 죽게 한 날조된 옥사라고 기록했다. 

 야사(野史)는 남이 장군이 ‘북정가(北征歌)’라는 시를 지었는데, 남이를 시기한 유자광이 이 시를 과장하여 그를 무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남이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한 후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면서 지었다는 북정가는 남이의 웅장하고 거침이 없는 기상을 담고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白頭山石摩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頭萬江水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말하겠는가. (後世誰稱大丈夫)'


 남이의 북정가를 유자광이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평국(未平國)’ 대신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남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증거라고 무고하여 남이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정가 이야기는 남이의 역모에 대한 심문 과정을 포함하여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남이 장군이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 아님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혜성의 출현


 1468년 예종 즉위년 9월, 밤하늘에 돌연히 혜성이 나타나 한양의 백성들이 모이면 수군거렸다. 

 "새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하늘에서 징조를 보이니, 무슨 난이라도 있으려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혜성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세조가 예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당일인 9월 7일이었다. 다음날,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새 임금이 된 그날 밤하늘에도 다시 혜성이 나타났다. 이후 9월 26일까지 이틀 동안만 혜성이 관측되지 않고 18일간 연속해서 혜성이 나타났다. (예종실록, 즉위년 9월 7일∼26일)

 9월 27일, 예종은 천지신명과 부처에게 제사를 지내 혜성이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빌었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이와 강순은 혜성의 출현이 반란과 같은 재앙을 몰고 오는 예사롭지 않은 조짐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실록의 기록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실록에 의하면, 남이는 국문 장에서 역모 혐의로 문초를 받다가 대신들과 함께 임금의 곁에 있는 우의정 강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이(강순)는 바로 신과 반역을 모의한 한패입니다. 지난 9월에 대행 왕(세조)께서 승하한 뒤에 마침 혜성이 나타나는 성변(星變)이 있었고 강순이 궁궐의 도총부에서 숙직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았더니 강순이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었는데 바야흐로 성변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먼저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응답하기를, ‘우리의 세(勢)가 약하니 먼저 선수(先手)를 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강순이 옳게 여기며 말하기를 '내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네.' 하였습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7일) 

 남이와 강순은 혜성의 출현을 한명회가 주도하는 구공신들이 이시애의 난으로 조정에서 부상한 신(新) 공신들을 제압하기 위해 난을 일으키려는 징조로 보았다. 


 남이와 강순이 그렇게 의심할 만한 사건의 발단은 역사 속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가 승하할 즈음에 조정은 구공신과 신공신으로 나뉘었다. 구공신은 한명회를 중심으로 김종서, 황보 인을 제거한 계유정난을 일으켜 세조가 왕으로 등극한 데 공을 세운 신하들이고,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남이와 강순 등 무인들을 중심으로 한 공신들이다. 세조 말년에 신공신들은 조정에서 약진이 두드러졌다. 영의정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총대장 귀성군 이준이 올랐고, 우의정에 토벌대장 강순, 병조판서에 남이가 차지하였다. 

 세조는 남이를 사랑하고 아꼈다. 남이의 할머니는 세종대왕의 누이인 정선 공주이니, 남이는 세조의 조카였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소년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한명회와 함께 세조 즉위의 1등 공신인 좌의정 권람이 남이를 점찍어 사위로 삼을 정도였다. 

 구공신들은 세조가 승하하자, 남이를 비롯한 급부상한 신공신들과 무장 세력들이 병권을 장악한 것이 불안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새 임금인 예종이 즉위한 다음날, 구공신들은 임금에게 나아가 병조판서 남이를 배척하였다. 

 "남이의 사람됨이 병권을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합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예종은 구공신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곧바로 남이를 정 2품 병조판서에서 종 2품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겸사복장은 왕의 신변보호를 맡은 경호군사인 겸사복을 통솔하던 오늘날 대통령 경호실장과 같은 무관 벼슬이었다. 

 남이는 하루아침에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분노와 함께 불안감에 휩싸였다. 구공신들이 결국 자신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뜻이 있다고 믿었다. 하늘에 혜성이 등장한 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자, 이러한 불안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은 이러한 남이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남이의 역모에 동조한 무장 민서는 예종이 남이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친국을 하자,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남이가 어제 신의 집을 찾아와서 지난해 역적 이시애와의 싸움을 말하고 또 북방의 형편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요즈음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났으니, 간신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그러면 내가 먼저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놀라 말하기를, 간신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남이는 곧바로 한명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하여 이를 임금에게 아뢰지 아니하는가 하고 물으니, 남이는 그들이 도모하는 짓을 자세히 살핀 뒤에 아뢰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남이는 ‘지금 한 말은 내가 홀로 너와 더불어 의논했다. 이 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발설할 수 없다.’ 하고서 술을 마시고 집을 떠났습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남이가 거사를 위해 포섭한 겸사복 문효량의 진술도 당시 남이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신(臣)은 지난 10월 초에 겸사복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남이도 겸사복장으로서 숙직하였습니다. 밤에 신이 남이의 침소에 들어가니, 남이가 《고려사》를 읽다가 신에게 이르기를, 혜성이 지금도 있느냐 하기에 신이 아직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남이가 말하기를, 천변(天變)은 헛되지 아니하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는가 하면서, 신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변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난(亂)을 꾀하는 간신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놀라서, 간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남이가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이 계속해서 물어보니,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어린 임금을 끼고 권세를 전횡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탄식하였습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6일)



 유자광이 신을 무고한 것입니다


 남이는 한 밤중에 갑자기 체포되어 창덕궁 동쪽에 있는 수강궁(훗날 창경궁이 됨) 후원의 국문장에 끌려왔다. 남이는 어떻게 거사(擧事) 계획이 새어나갔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거사계획이 탄로 났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단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임금은 새벽이 다가오도록 남이가 아무 잘못을 저지른 바가 없다고 계속 주장하자 고변한 유자광을 불러 남이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직접 말을 하게 하였다. 

 남이는 비로소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유자광의 고발 때문임을 알았다. 남이는 머리로 땅을 찧으며 부르짖었다.

 "전하, 유자광은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무고한 것입니다. 신은 충성스러운 선비로 평생에 충신 악비(岳飛)를 자처하며 살아왔는데, 어찌 불충(不忠)을 저지르겠습니까?”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악비는 남송(南宋) 시대의 무인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항해 싸워,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남이는 자신이 거사를 위해 포섭했던 민서와 문효량이 자백을 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남이는 결국 임금에게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창덕궁과 수강궁 두 궁은 담이 얕아서 거사할 때에 바깥사람이 알기가 쉽기 때문에 전하께서 산릉(山陵)에 나아갈 때에 사람을 시켜 두 궁을 불 지르게 하고 성상이 경복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12월 사이에 신이 강순과 더불어 일시에 입직(入直)하기를 약속하여, 신은 입직하는 겸사복(兼司僕)을 거느리고, 강순은 입직하는 도총부 군사를 거느리고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강순이 말하기를, ‘고향인 보령의 군사 가운데 당번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1백여 인인데, 만약 때에 임하여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산릉은 제왕의 묘를 가리키는 말로, 선왕인 세조의 묘를 말했다. 남이는 말을 이었다. 

 "다른 날에 강순과 더불어 같은 날 궁궐에 숙직하였는데, 강순이 신의 숙직하는 곳에 들러 《고려사》를 보다가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운 것에 대해 논하기를, ‘그때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하니, 지금의 형세와 같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일까?’ 하니, 강순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보성군과 더불어 국가의 일을 논하였는데 보성군이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아들 춘양정이 세 번이나 우리 집에 왔다가 갔으므로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보성군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아들이고 세조와 사촌 형제지간으로 강순과 남이 등 무인들과 잘 지냈다. 셋째 아들인 춘양정은 종친이면서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신망이 높았다. 또한 보성군의 둘째 아들 율원정은 이시애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책봉되었다. 특히 넷째 아들 평성정은 왕실 호위 군대인 내금위장으로 거사를 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남이의 진술을 임금 곁에서 대신들과 함께 듣고 있던 강순은 남이에게 소리쳤다. 

 "경망한 자야! 나를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다고 하느냐? 내가 너에게 명철한 주상전하를 힘써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이는 강순을 노려보고 소리 높여 말했다. 

 "내가 거짓을 말했다고 하는 것이오? 대감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은 길이요. 대감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많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는 겨우 스물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오.”

 남이는 강순에게서 눈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7일)

 남이는 거사계획 단계부터 유자광을 포섭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자광과는 전쟁터에서 함께한 동지적인 관계였다. 게다가 유자광은 무장들인 신(新) 공신들과는 긴밀한 유대가 있으나, 구공신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이는 유자광은 어차피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지 않으면 갈 데가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남이의 치명적인 오산이었다. 



 역모를 주도한 남이장군


 남이는 유자광을 가깝게 여겼다. 남이와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과 변방의 야인들을 토벌하고 전쟁터를 누비며 고락(苦樂)을 함께하여 특별한 정이 들었다. 더구나 유자광은 할아버지 때부터 가까운 친족 간이었다. 남이의 조부인 개국공신 남재(南在)와 유자광의 조부인 유두명(柳斗明)은 처남 매부 관계였다. 

 남이는 거사를 성공하려면 사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구를 거사에 가담시킬 것인지 여러 무장들을 떠올렸다. 남이는 거사를 치르는 날 병조의 군사를 얻으려면 정 3품 병조참지인 유자광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남이가 유자광을 포섭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는 겸사복장으로 궁궐에서 숙직할 때였다. 남이는 궁궐 내 병조의 출장소인 내병조(內兵曹)에서 숙직을 하고 있는 유자광을 방문했다. 남이는 그날 밤 유자광에 처음으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했다.

 "나라에 큰 상사(喪事)를 당하니, 인심이 위태롭고 시절이 의심스러워. 이런 때, 간신이 난(亂)이라도 일으키면 나는 물론 너도 개죽음을 당할 것이야. 마땅히 너는 나와 함께 충성을 다해 선왕의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이야.” 

 유자광은 남이가 하는 뜻밖의 말에 놀라 물었다.

 "어떤 간사한 사람이 있어, 난(亂)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남이는 유자광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조정에 간사한 사람으로 가득 찬 것이 보이지 않느냐? 구공신들을 보아라! 한명회는 욕심 많은 추한 구공신의 우두머리이고, 노사신은 매우 어리석은 자이다. 김국광은 정사를 전횡하여 재물을 탐하니 이 같은 무리는 죽이는 것이 옳다. 한명회와 친한 한계희와 김국광, 노사신 등이 주상께 나에 대해 없는 말을 꾸미어, 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강등되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그날 남이는 유자광에게 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내병조를 떠났다. 

 그 후 남이는 유자광의 집을 밤중에 방문하였다. 실록은 이날 밤 남이가 한 말을 유자광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 밤에 남이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혜성이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데 빛의 줄기가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나 설명한 곳을 찾아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빛의 줄기가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남이는 역사책에서 말하는 대로 혜성의 출현으로 반드시 장군이 반역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바로 자신이 거사(擧事)하려고 한다고 실토했다. 유자광은 이 같은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남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수강궁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이라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같은 큰일을 우리들이 어찌 능히 홀로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또한 주상이 반드시 창덕궁에 머물 것이다.’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경복궁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남이가, ‘이는 어렵지 않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런 말을 내가 홀로 오직 너와 더불어 말하였으니, 네가 비록 고할지라도 내가 숨기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내가 비록 고할지라도 네가 숨기면 내가 죽을 것이므로, 이 같은 말은 세 사람이 모여도 말할 수 없다. 또 세조가 전국의 장정(壯丁)을 다 뽑아서 군사로 삼았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 나는 호걸(豪傑)이다.’ 하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려고 하자 이미 취했다고 말하며 마시지 아니하고 갔습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유자광은 왜 남이의 거사에 가담하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곧바로 임금에게 고발하였을까? 유자광으로서는 남이에게 들은 말을 제외하고는 남이의 역모를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남이의 말대로 유자광이 비록 고할지라도 남이가 부인하면 오히려 유자광이 무고죄로 죽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조정에서 유일하게 천출인 자신을 믿고 지지하던 세조는 이미 돌아가지 않았는가. 

 당시 유자광의 입장에서 보면 남이의 거사에 선뜻 참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이는 단순히 신공신들을 위협하는 구공신들을 미리 치겠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임금까지 위험에 빠트릴 역모였기 때문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남이의 반역에 동조한 겸사복 문효량의 진술이다.

 "남이가 말하기를, 산릉에 나아갈 때 중간에 먼저 두목 격인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과 귀성군을 처리하고, 그리고 임금의 가마를 덮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6일)

 유자광은 일찍이 세조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 세조는 천한 출신으로 경복궁 문지기에 불과했던 자신을 발탁하여 병조정랑에 임명하였다. 병조정랑은 오늘날 국방부의 인사국장급 정도가 된다. 실록에 의하면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은 크게 반발하였다.

 "병조의 정랑 자리는 나라와 군의 중대한 일을 결정하고 무인의 인사를 담당하는 직책입니다. 이러한 관직에 오를 자는 고르고 고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반드시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 직책을 맡게 하고, 가문과 재주와 행실을 세세히 살펴 고르는 것이 나라의 법입니다. 유자광의 출신은 첩의 아들로서 재주와 행실이 천박하고 용렬하니 병조정랑 자리는 아니 되옵니다.”

 세조는 유자광을 적극 지지하며, 단호하게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발을 잠재웠다. 

 "어찌해서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면 재주와 행실을 당연히 천박하고 용렬하다고 보느냐?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 과인은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9월 22일) 

 이후 세조는 유자광을 과거에 장원급제를 시켜 정 3품 병조참지까지 승진시켰다. 병조참지는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급이다


 남이는 세조에 대한 백성의 원망이 지극히 깊으니 기회를 잃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세조에 대한 은혜가 깊은 유자광은 남이가 세조를 비난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유자광은 오히려 세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은 남이가 배은망덕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조는 삼십도 되지 않은 남이를 병조판서의 지위에 올리지 않았는가. 새로 즉위한 임금이 구공신들의 말을 듣고 곧바로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했으니, 남이는 구공신들은 물론 주상에게도 원한이 있는 것이라고 유자광은 생각했다. 

 유자광은 남이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거사계획을 털어놓은 그날 밤, 즉시 말을 몰아 궁으로 달려 남이의 역모를 막았다. 유자광은 세조의 유일한 계승자인 임금을 지킴으로서 세조가 베풀어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유자광은 또한 이것이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감지했을 터이다. 

 남이의 죽음은 무고나 모함이 아닌 실패한 역모에 의한 것임을 사실(史實)이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유자광을 증오한 사림이 지배한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남이가 유자광의 무고로 죽었다고 하여 복권을 요청한 일이 없었다. 남이의 복권은 순조 18년, 죽은 지 350년 만에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비로소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남이가 무고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전문 역사학자들이 학술논문에서 유자광에 대해 언급할 때 남이를 거짓으로 고변하여 억울하게 죽게 한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은 물론 역사학자들에게까지 남이의 역모 사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은 후세 사람들이 역사를 사실(史實)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게 하는 기록된 보물이다.   

 남이의 역모를 막은 유자광은 세조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세조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얼자이며 갑사로 비천한 신분인 유자광을 발탁한 것이 훗날 자신의 계승자인 예종이 참극을 당하는 일을 막은 셈이다. 오늘날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어찌해서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면 재주와 행실을 당연히 천박하고 용렬하다고 보느냐?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느냐? 과인은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세조실록, 재위 13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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