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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Oct 06. 2023

조선 최대의 사초(史草) 조작 사건

 사초 조작은 참형의 죄였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기록유산을 남긴 조선에게 역사는 무슨 의미였을까? 김종서는 《고려사》를 편찬하여 임금에게 올리면서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보아 법으로 삼고, 뒷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興亡)의 자취는 실로 앞으로 오는 미래에 권고하고 경계함이 되므로 이에 책을 엮어 감히 임금께 드립니다.” (문종실록, 재위 1년 8월 25일) 

 조선에게 역사의 의미는 지나간 흥망의 자취를 되새김으로써 이를 통해 장차 다가 올 미래에 교훈을 얻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울이자 등불인 셈이었다. 

 예로부터 나라가 세워지면 사관(史官)을 두어, 국가의 중대사를 기록하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중요성은 조선시대 사관들이 직접 쓴 글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 예문관 소속의 사관들이 역사와 사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의 견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대에 내려오는 나라마다 사관을 두어, 당시의 일을 기록하되, 아름다운 점을 가리지도 않고 나쁜 점을 숨기지도 않아 사실에 따라 바르게 써서, 하나같이 공정하여 기록에 늠름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함이 부월(鈇鉞, 도끼)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으니,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중종실록, 재위 2년 6월 10일)

 어느 시대보다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선발과정도 엄격하였다. 사관의 자리가 비면 춘추관의 당상으로 하여금 과거에 급제한 자로 해당 직책의 품계에 맞는 자를 모아 시험을 보게 하였다. 시험을 통해 경전과 역사에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난 자를 뽑아,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허물이 없고, 인품이 좋은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그중에서 선발하게 하였다. 

 사관들은 항상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어떠한 국가의 중대한 회의라도 참석해 사실을 기록하고, 온갖 기밀문서를 다 입수해 사초(史草)를 작성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역사로 남겨야 할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문서의 초고를 말한다. 사초는 두 부로 작성되었는데 하나는 사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작성하여 집에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고, 또 하나는 예문관에서 보관하는 사초이다. 

 가장사초는 예문관에 보관하던 사초와는 달리 조정이나 민간에서 듣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세상의 평가나 소문 등을 종합하여 기록할 수 있었다. 임금이 승하하면 곧바로 실록청이 설치되고, 선왕 시절의 사관들은 집에 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를 실록청에 제출하여야 했다.

 '쓰레기를 입력하면 쓰레기가 나온다. (Garbage in, garbage out.)'란 말이 있다. 실록 편찬의 기초가 되는 사초(史草)가 바르게 기록되지 않고서는 역사기록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사초를 긁어 없애거나, 도려내거나, 먹으로 지우는 조작행위를 하면 엄격한 법으로 다스렸다. 해당 사관은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의 일탈행위를 막기 위해 어떤 법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세종 시절,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춘추관(春秋館)은 사관으로서 사초를 훔치거나 조작, 누설한 자의 형벌을 정하고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본관(本館)에 소장한 사초는 모두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지극히 중하여,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관이 자신과 관계되거나, 친척이나 친구의 청탁을 듣거나 하여 흔적을 없애려고 사초를 훔친 자는 참(斬)하고,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도 참하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한 등급을 낮추고,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참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재위 31년 3월 2일) 

 세종은 춘추관의 제의를 그대로 따랐고, 이후 조선의 법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사관이 사초를 조작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종 때의 일이었다. 어찌하여 사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초를 조작하기에 이른 것일까?



 사초 실명제 


 조선 최대의 사초 조작 사건의 발단은 세조의 아들인 예종의 즉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가 승하하자 실록 편찬 작업을 위해 실록청이 만들어졌다. 신숙주, 한명회, 양성지 등 세조 때의 훈구대신들은 대거 실록 편찬의 고위 책임자인 실록청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실록청 당상은 대체로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 좌의정과 우의정이 겸하는 감사, 판서급이 겸하는 지사, 참판급이 겸하는 동지사, 여섯 승지와 홍문관 부제학 및 대사간이 겸하는 수찬관으로 구성되었다. 실록청의 당하관은 실무 작업을 하며 실록청 당상을 보좌했다. 

 예종은 돌아가신 부왕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실록 편찬을 앞두고, 선왕의 일을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했는지가 마음이 걸렸다. 

 "노산(魯山) 때의 승정원일기 및 계유년 정란(靖亂)) 때의 기록을 내전(內殿)으로 들여오라. 과인이 한 번 살펴보려 한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노산은 단종을 말하며, 계유년 정난은 단종 1년에 수양대군이 원로대신인 황보 인과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하여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예종은 세조의 즉위 과정 등 여러 가지 사건을 사관들이 엄정하고 비판적으로 쓸까 염려하여 사초 실명제를 명했다.

 "실록청은 선왕 시절에 사관을 역임한 모든 이들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거두어들이고, 반드시 사관의 이름을 써서 제출하게 하시오.” 

 세조와 운명공동체인 훈구대신들도 사관들의 붓끝을 둔하게 하여 신랄한 비판을 억제하려고 예종의 명에 적극 동조하였다.  


 세조 때 사관이었던 원숙강(元叔康)은 사간원의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실록청이 만들어지자 기사관으로 실록 편찬 업무를 지원하고 있었다. 원숙강은 선왕 때의 사관들이 이름을 써서 실록청에 사초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원숙강은 ‘사초에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간원의 동료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임금에게 간하기로 했다.

 예종 1년 4월, 헌납(獻納) 장계이가 사초 실명제에 대한 사간원의 의논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사간원은 정 3품 대사간을 수장으로, 종 3품 사간(司諫), 정 5품 헌납, 정 6품 정언(正言)으로 구성된다.  

 "사(史)는 직필(直筆)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춘추관에서 사초를 거두면서 사관의 성명을 책에다 쓰도록 하였는데, 사초는 단지 국가의 일만 기록한 뿐만 아니라 사대부(士大夫)의 선악과 득실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한다면 신(臣) 등은 사관들이 원망을 얻을까 염려해서 직필(直筆)을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사초로 실록을 만드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옛사람도 또한 성명을 썼다는데, 무슨 말이냐? 누가 먼저 이 말을 냈느냐?”

 장계이가 아뢰었다.

 "정언(正言) 원숙강이 지금 춘추관에 파견되어 있기 때문에, 사간(司諫) 조간과 더불어 말했습니다. 옛사람이 성명을 썼다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11일)

 임금이 원숙강을 불러 물어보니, 원숙강이 아뢰었다. 

 "신(臣)이 춘추관에 출사(出仕)하면서 사초를 보니 모두 사관의 성명을 써놓았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와 같이 하면 대신들의 원망을 얻을까 염려해서 역사를 바른대로 쓰는 사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동료와 의논하여 아뢴 것입니다.”

 예종은 원숙강을 나무랐다.

 "너는 어찌 견문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원숙강이 거듭 사초 실명제는 불가하다고 아뢰자 임금이 말했다.

 "실록을 편찬함은 선왕의 공덕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인데,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관이 사대부의 일을 바르게 쓰지 못할까 염려하니 어찌 된 일이냐?”

 예종은 원숙강과 사간원의 간원들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가 곧 방면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려워서 용서하여 준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11일)

 원숙강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초에 이름을 쓰게 하면 장차 사관이 기록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는 우려는 무시되었다. 하루아침에 누가 사초를 쓴 것인지 밝히는 사초 실명제로 바뀐 것이었다. 실록청의 고위직을 차지한 대신들은 혹 자신을 비난하는 사초를 읽으면, 누가 그 사초를 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작성한 사관들에게 사초 실명제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다.



 죽은 왕보다 살아있는 대신이 무섭다


 갑자기 바뀐 사초 실명제에 동요하여, 조선 최대의 사초 조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민수(閔粹)였다. 민수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다. 세조 2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세조실록, 재위 2년 1월 25일)

 과거의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있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는 부(賦, 산문과 시의 중간 형태)와 시(詩)로 문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3년에 한차례 실시하였다. 각각 100명의 합격자를 뽑아 생원과 진사라는 명칭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민수는 세조 5년에 실시한 과거에서 33명을 선발할 때, 장원급제를 아깝게 놓치기도 하였다.  

 “처음에 시관(試官)이 민수를 1등으로 삼았는데, 임금이 고태정의 책문을 보고 말하기를 ‘재주가 뛰어났으니 1등에 둘 만하다’ 하였다.” (세조실록, 재위 5년 4월 1일) 

 또한, 임금이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락했을 때, 민수는 당당히 선발되었고 (세조실록, 재위 5년 6월 29일), 훗날 예종의 세자 시절에 스승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사가독서는 학문과 문장이 높은 정 3품 당하관 이하의 젊은 관리들에게 임금이 특별 휴가를 주어 직책은 유지한 채 직무에서 벗어나 독서 및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세조의 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설치될 당시, 민수는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봉상시(奉常寺)에서 종 4품 첨정 벼슬을 하고 있었다. 민수도 선왕 때에 사관을 지냈으므로 집에 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를 책으로 묶어 실록청에 제출하였다. 


 실록청에서 사초의 접수를 담당하던 예문관 봉교 이인석이 책 표지에 이름을 적게 하자, 민수는 당황하였다. 실록 편찬을 감독하는 한명회와 양승지 등 여러 대신들을 비판한 내용이 있어 이름을 써넣기가 주저되었다. 얼마 전에 법이 바뀌어 제출하는 모든 사초에 이름을 적어서 내도록 되어있다고 하니, 민수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였다.    

 민수는 사초를 제출하고 나오면서, 실록청의 당상관들이 자신이 쓴 사초를 읽을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대신들이 사초를 읽고 자신의 글임을 알게 되면,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 할 것이었다. 민수는 신경이 곤두서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민수는 실록청 이인석의 집을 찾아가 제출한 사초를 잠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예종이 이인석을 심문한 기록이 이 상황을 잘 보여준다. 

 “민수가 신(臣)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사초에 양성지와 임원준에 대해 쓴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하물며 양성지는 춘추관의 당상(堂上)이라 마음이 매우 편안치 않으니, 도로 가져가서 고쳐 쓰고 싶다.’고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사초는 나의 소관이 아니고, 또 나라의 역사를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5일)

 민수는 이인석이 자신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청을 들어주지 않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민수는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가까운 벗인 기사관 강치성을 찾았다. 강치성은 민수가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할 때 같이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를 한 막역한 사이였다. 

 강치성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민수가 워낙 절실하게 말하자 제출한 사초를 빼내어 민수의 소매 속에 넣어 주었다. 


 자신이 작성한 사초를 받아 든 민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문제가 될 만한 곳을 서둘러 찾았다. 민수는 우선 실록청 당상관인 한명회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면서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역을 도모한 것처럼 말했다’고 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민수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이 글을 보면,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불안했다. 한명회와 신숙주가 실제로 임금을 배반하고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는데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뜻의 ‘불궤(不軌)’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민수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인 한명회와 신숙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여 아예 불궤(不軌)라는 표현을 지워버렸다. 

 민수는 사초를 넘겨 실록청 당상관인 양성지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부유한 상인 여러 명이 재화를 다투다가 송사가 일어나자 임금은 사헌부에게 이를 조사하게 하였고, 이후 진행사항을 물었다. 사헌부 집의 등이 대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사헌부 관리 전원을 하옥시켰는데, 대사헌 양성지는 홀로 구차하게 용서를 구하여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라고 써져 있었다. 

 민수는 붓을 들어 구차하게 용서를 구했다는 표현인 ‘구용(苟容)’을 지웠다. 

 훈구대신인 홍윤성에 대해서는 ‘정난공신 홍윤성이 처녀를 간통했다고 그 집안사람이 고소하므로, 홍윤성을 하옥하여 조사하였는데, 고소한 사람은 무고죄를 얻었고, 나중에 그 처녀를 홍윤성이 데리고 살았다'는 글이 보였다. 민수는 이 기록을 아예 통째로 지워버렸다. 

 훈구대신 김국광에 대한 기록을 보니, ‘성품이 절개가 없고 탐욕이 많았다’고 써여 있었다. 민수는 김국광에 대한 상당히 박한 평가를 완화하여 ‘김국광은 오래도록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로 바꾸었다.

 그리고 윤사흔이 술에 취해서 용렬한 말을 했다는 기록과, 임원준이 의술로써 관직을 얻었다는 기록도 마음에 걸려, 수정하여 고쳐 썼다. 이로써 민수는 자신이 제출한 사초에서 한명회와 신숙주, 양성지, 홍윤성, 김국광, 임원준 등 일곱 명의 대신들에 관련된 기록을 고쳤다. 민수는 고친 사초를 은밀히 강치성에게 다시 건넸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4일의 기록을 재구성) 


 실록청 관리들이 제출된 사초들을 살펴보다가 민수의 사초에 여러 군데 부자연스럽게 고친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이 실록청의 당상들에게 보고되었고, 한명회와 실록청 당상들은 이러한 사실을 곧장 임금에게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는 만세(萬世)의 공론입니다. 민수가 사초를 건드려 나중에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4일)

 예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민수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의금부가 민수의 집에 들이닥치자, 민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아내가 말려 멈추었다. 의금부 나졸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종이를 태우다 남은 재 등 사초를 고치면서 남긴 흔적을 수집하고, 민수를 포박하여 궁궐로 압송하였다.

 실록은 이날의 국문 장면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임금은 끌려온 민수를 친히 심문하였다. 

 "네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하였느냐?”

 민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자복하였다. 임금이 민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사초를 고쳤느냐?”

 "신(臣)이 강치성에게 청하여 사초를 빼내었습니다.”

 임금은 부모의 병 때문에 휴가를 내고 고향에 급히 내려갔다는 강치성을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다시 민수에게 물었다. 

 "네가 고치고 삭제한 것은 어떤 기록이었더냐?”

 "신이 사관으로 있을 때 전해 들은 일을 썼던 것입니다. 사초를 바칠 기한이 촉박하여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제출하였는데, 생각해 보니 사(史)라는 것은 만세(萬世)에 전해지는 글인데 전해 들은 일을 망령되이 기록함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치고 지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전해 들은 일을 썼느냐? 선왕의 일도 또한 전해 듣고 쓴 것이냐?”

 민수는 임금에게 변명하며 아뢰었다. 

 "신이 고쳐 쓴 것은 선왕의 일이 아니라 대신들의 일입니다.”

 "네가 고치고 지운 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전부 말해 보아라!”

 "양성지와 여러 대신들이 지금 실록청에 당상관으로 있어 신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고쳤습니다.” 

 "대신들의 일을 썼다가 다시 삭제하였으니, 네가 대신들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다!”

 "신(臣)은 단지 대신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을 뿐이지, 실제로 아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초에 직필(直筆)을 기록했으나, 고치고 지운 것은 오로지 재상(宰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유독 이들 재상뿐이겠느냐? 그 외에도 두려워한 대신들을 모두 아뢰어라.”

 "무릇 재상이면 어느 누군들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더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두려운 자가 없겠느냐? 민수가 오히려 숨기는 것 같으니, 그에게 장(杖)을 때려서 심문하게 하라.”

 민수는 매를 맞으며 두려워하는 대신들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니, 거의 20여 명에 이르렀다. 매를 맞으며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민수를 보니, 임금은 세자 시절에 사제지간이었던 정이 생각이 났다. 예종은 장(杖)을 그치게 하고 결박도 풀어주게 하였다. 

 민수는 임금에게 자신이 집안의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보존하여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4일)


 한명회가 어전에 나아와 임금에게 아뢰었다.

 "원숙강이 전날에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반드시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니, 청컨대 묻게 하소서.”

 임금이 원숙강을 불러 물으니 굳이 숨기므로, 가두게 하였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4일) 

 예종은 민수의 일이 발각되면서 또 다른 사초가 고쳐진 것이 있는지 춘추관에 명하여 모든 사초(史草)의 고치고 지운 곳을 찾아서 살피게 하였다. 실록청 관리들은 원숙강이 제출한 사초에 지워서 고친 곳이 있음을 찾아내었다. 편수관 김계창이 아뢰었다. 

 "원숙강의 사초를 보니, ‘권남이 졸(卒)하였다’고 쓴 아래에 ‘임금이 부처(佛)를 좋아하였다’는 것과 ‘권남이 큰 저택을 지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삭제하고 단지 그 ‘권남이 졸하였다’만 쓰여 있습니다.” 

 한명회는 원숙강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원숙강이 권남이 죽었다는 기록 밑에 임금에 관한 말을 함께 써넣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7일)

 임금은 원숙강을 친히 국문하였다. 19살의 젊은 임금 예종은 원숙강에게 물었다. 

 "너는 임금의 허물에 관한 기록은 남기고 재상의 허물은 삭제하였으니,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

 "대신을 거스르면 그 화(禍)가 빠르게 미치기 때문에, 신이 삭제하였습니다.”

 임금이 분노하며 말하였다. 

 "너는 대신에게는 아부하고,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신이 어찌 그리 하겠습니까?”

 "너는 선왕의 허물을 적은 것은 남기고, 대신의 허물만을 지웠다. 네가 재상에게는 아부하고 과인을 어린 임금이라고 얕보고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원숙강은 임금의 꾸짖는 말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임금은 의금부에 지시하여 원숙강을 ‘임금보다 대신들을 더 무서워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7일) 

 원숙강의 할아버지 원호(元昊)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살아서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원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폐위되어 영월로 쫓겨 가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원호는 손자가 벼슬길에 올라 사화(史禍)로 참형을 당하자 손자의 글과 자신이 쓴 책을 꺼내어 모두 소각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학문을 닦더라도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침)은 탐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의금부에 지시하여 사초를 민수에게 내어준 강치성을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처음 사초를 빼내어달라고 청탁을 받았던 이인석은 사실을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곤장 1백대를 때린 후, 고향에서 군역을 치르게 하였다. 

 왕은 민수를 불쌍히 여겨 참형은 면하게 해 주었다.

 "과인이 세자 시절부터 민수를 봐서, 그의 사람됨을 잘 안다. 민수는 장(杖) 1백 대를 때려서 제주의 관노에 배속시켜라.”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7일)

 조선 최대의 사초 조작 사건을 역사에서는 ‘민수의 옥(獄)’이라 부른다. 대신들이 대개 실록 편찬을 책임지는 고위직인 실록청 당상이므로 이들이 자신의 글을 보고 필화를 입을까 두려워 사초의 내용을 고치다가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관으로서 역사가 내리는 평가보다 인사권을 가진 대신들의 평가를 더 중하게 여겨 생긴 비극이었다. 


 사(史)라는 글자는 만들 때부터 손(手)으로써 중심(中)을 잡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관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가필이나 곡필을 하면 어찌 역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실록은 사관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관은 지위는 낮지만 만세의 공론(公論)을 쥐고 있으니, 위세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사사롭게 아부해서도 안 된다. 크게는 사관은 임금의 득실과 작게는 대신의 선악을 붓을 잡고 기록하니, 위엄 있고 당당하되 무례해서는 안 된다. 사관은 진실로 정승들의 부하가 아니다.” (중종실록, 중종 11년 8월 1일)

 사관은 춘추필법으로 준엄하게 직필을 해야 한다. 사관은 오로지 역사와 후세 사람들의 평가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관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쓴 것을 지우거나 아예 쓰지도 않는다면, 임금이나 대신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날에는 날씨 외에 사관이 기록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책무는 무거운 것이다. 오늘날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한 글자의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함이 부월(鈇鉞, 도끼)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습니다. 이런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중종실록, 재위 2년 6월 10일)

 “사관은 지위는 낮지만 만세의 공론(公論)을 쥐고 있으니, 위세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사사롭게 아부해서도 안 된다. 사관은 임금의 득실과 작게는 대신의 선악을 붓을 잡고 기록하니, 위엄 있고 당당해야 한다.” (중종실록, 재위 11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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