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의 억울한 영혼이 구천(九泉)을 헤매다 나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김종직은 충격적인 소식에 몸을 바로 가눌 수가 없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이 어린 상왕(上王)의 복위를 꾀하다가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김종직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존경해 온 집현전 학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소식에 숨이 막혔다. 세상이 요동치는 듯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모이면 수군거렸다.
"집현전 학사들의 머리가 거리에 효수되고, 학사들의 아버지와 형제, 아들과 손자까지 모두 처형을 당했대.”
"이제 한 두 살 된 어린 사내아이마저 입에 소금을 채워 죽게 했다니...... 역적의 자식이라도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는 것이 법일 진대, 참으로 가혹한 처사일세!”
"학사들 집안의 여인네들도 아주 결딴이 났다는 거야. 아내와 딸은 물론 어머니까지 모두 노비가 되었으니.....”
김종직은 속이 메스꺼워 헛구역질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집현전도 없어졌다는 소식이 뒤따라 들렸다.
김종직은 연이어 황당하고 허탈한 소식들을 들었다. 상왕이 복위 운동의 여파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왕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도 폐서인이 되어 종묘에서 위패가 철거되고 왕후의 무덤인 소릉(昭陵)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김종직은 성균관 유생 시절 어린 왕이 현덕왕후의 위패를 문묘에 모시고 돌아오는 행렬이 생각났다. 갑자기 눈에 물이 고여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가슴 깊은 곳에 통증을 느껴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내 나라에 이런 일이...... 왜 이토록 참담한 일이......”
아버지의 유언 같은 호소로 늘 마음속에 갈등이 있었으나, 이제 과거에 급제하여 피 냄새 가득한 조정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김종석은 동생 종직이 과거에 뜻이 없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번 과거에서도 시험을 치르기는 했지만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존경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역모의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벼슬하려는 마음을 접은 듯이 보였다.
종직은 형의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형님, 저는 공자님이 하신 말씀 중에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말씀이 제일 좋습니다.”
종석은 어떻게든 동생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데 마땅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동생의 표정만 살폈다.
"저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영산향교의 경험을 살려 맹자의 삼락(三樂) 중에 가르치는 즐거움으로 살고자 합니다.”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그리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종직은 형에게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를 하며 과거에 뜻이 없음을 완곡히 드러내었다. 종석은 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당부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학문하는 본질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지 않느냐. 먼저 스스로 수양하여 도를 이루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벼슬에 나아가 그 도를 실현하여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배우지 않았느냐. 맹자는 군자는 종신토록 간직한 근심이 있다고 했다. 현실의 세상은 늘 어렵기 때문에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선비는 본래 세상을 걱정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너도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직은 형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시대가 도(道)를 행할 만한 조건을 갖춘 시대인가, 또한 군주가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석은 이미 돌처럼 굳어버린 동생의 결심에 답답했다. 동생의 마음을 돌리려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불러냈다.
"너는 아버지가 하신 당부를 잊었느냐?”
종직은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곧 단호하게 말했다.
"학문한 선비의 길은 두 가지가 있는 듯합니다. 글을 읽고 ‘수신제가(修身齊家)’한 뒤에 형님처럼 벼슬길에 나아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제가 생각한 것처럼 초야에서 성현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집안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님이 과거에 급제하셨으니 마음의 짐이 덜합니다.”
종석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설득했다.
"아버지의 높은 학문을 이어받은 네가 아버지의 소망대로 대제학이 되어 이 땅에 도학(道學)을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제 생각은 이미 벼슬길에 오른 형님이 그 일을 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 만한 재주도 없지만 그동안 아버지 무덤 곁에서 시묘(侍墓) 생활을 하다가 풍병이 들어 오래 살 자신도 없다.”
종석은 동생의 굳은 결심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막막했다.
1457년 세조 3년 10월.
김종직은 경산의 향교에 가는 길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난번 어린 선왕(先王)이 영월에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침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사약을 내렸다.’, ‘목을 매어 죽게 했다.’,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등 여러 가지 풍설이 난무하였다.
종직은 통곡을 하면서 걷다가 탈진하여 경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답계역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김종직은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누웠지만, 어린 임금의 원통한 죽음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에 종로거리에서 뵈었던 쓸쓸하고 가련해 보이던 선왕의 모습이 생각났다.
전전반측(輾轉反側)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눈앞에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이 나타났다.
종직은 꿈인 듯 생시인 듯 놀라 물었다.
"뉘, 뉘시옵니까?”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이다. 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강에 잠겼다."
종직은 놀라 손을 휘저으며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꿈에 나타난 귀신을 생각해 보았다.
‘회왕은 중국의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서로 떨어진 거리는 만여 리가 넘고 세월 또한 천 년이 넘었는데, 꿈속에 나타나다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김종직은 역사를 상고해 보니, 자신이 아는 한 회왕을 살해하여 강에 던졌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강에 잠겨있다고 했을까?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격살하고 그 시신을 몰래 물에다 던져버린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종직은 생각 끝에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어린 선왕의 억울한 영혼이 구천(九泉)을 헤매다 나의 꿈에 회왕으로 나타난 것이다.’
종직은 어린 왕의 죽음이 새삼 아프고 북받쳐 어둠 속에서 흐느꼈다.
"원통한 죽음으로 떠도는 귀신이 되시다니...... 억울한 넋을 정성으로 위로하여, 저승길을 편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김종직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에 불을 밝혔다.
종직은 조용히 방을 나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다시 방에 들어온 종직은 의관을 갖추어 입고 옷깃을 여미었다. 봇짐에서 벼루를 찾아 물을 부어 먹을 정성스럽게 갈고, 붓을 든 채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선왕의 원통한 죽음을 위로하려면 지금 임금의 불의함을 비난해야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붓을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옆방에 묵고 있는 과객들이 포졸로 변하여 들이닥칠 것 같았다.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 인기척이 나는지 방문 쪽을 살폈다.
‘글이 빌미가 되면 나야 억울할 것도 없지만, 멸족의 화를 입을 수 있다. 더구나 형님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김종직은 등잔의 불을 끄고는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김종직은 드디어 눈을 뜨고 조용히 다짐했다.
"원통하게 죽은 어린 선왕께 올리는 제문으로 넋을 위로해드리되, 글을 쓰는 동안 누가 우연히 들어와서 보게 되더라도 아무도 눈치재치 못하게 하자.”
김종직은 이 밤에 은밀히 쓰고자 하는 제문이 훗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끔찍한 사화(士禍)를 초래하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김종직은 등잔불의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고,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제문은 제사를 지낸 후에 바로 불에 태워 하늘에 올려드리자.’
김종직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붓을 쥔 손을 곧추세워 제문을 쓰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단종을 초나라 회왕으로 바꾸어 쓰면서 원통하게 죽은 어린 왕을 추모하였다.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본성(本性)을 주었으니
이 세상 어느 누가 삼강오륜을 모를 것인가.
중화(中華)라고 많이 주고 동이(東夷)라고 적게 주었을 것인가.
옛날에 있었다면 지금이라고 없겠는가.
동이 사람인 나는, 천 년이 지난 뒤에
삼가 초나라 회왕을 글로서 조문 하노라.’
김종직은 여기까지 쓰고, 강원도 영월 방향을 향하여 네 번 절을 올렸다.
몸의 깊은 곳에서 울음이 밀고 올라왔다. 김종직은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혼령에게 고했다.
"억울하게 승하하신 임금님께 삼가 글로서 조문을 올립니다.”
김종직은 다시 붓을 들었다.
‘옛날 조룡(祖龍)이 포학하여
사해가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작고 큰 물고기들 살길 찾아 헤매었지
초나라 장수의 후예 항량(項梁)은 진승(陳勝) 따라 일어나
왕손을 찾아내 끊긴 제사 이어주었네.’
조룡(祖龍)은 진시황(秦始皇)을 가리켰다. 조(祖)는 시(始)와 같은 뜻이요 용(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시황(始皇)의 은어(隱語)였다. 진시황이 포악하여 진승이 농민 반란을 주도했고, 그로 인해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김종직은 이때 초나라의 장수 항량도 군사를 일으키고 초나라 왕실의 후예를 찾아 회왕으로 삼은 역사적 사실(史實)을 말하였다.
김종직은 초의 회왕으로 은유한 단종이 당한 일을 생각하니 비통한 울음이 터져, 어깨를 들썩였다. 김종직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붓을 들어 먹물을 찍었다.
‘회왕은 의제(義帝)로, 하늘의 명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 세상에 진실로 더 높은 이 없었다.
양흔낭탐(羊狠狼貪)이 관군을 마음대로 죽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안 했는가.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김종직은 항량의 조카인 항우(項羽)를 가리켜 양흔낭탐, 즉 발끈하긴 양과 같고 탐욕은 이리와 같다고 묘사했다. 항우는 의제가 상장군으로 삼은 대장군 송의(宋儀)를 모반을 했다는 누명을 씌어 죽이고 상장군직을 차지하였는데, 수양대군이 멋대로 어린 왕을 보좌하는 김종서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것을 비유한 것이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회왕을 황제로 옹립하여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결국에는 잔혹하게 의제를 시해하고 말았다.
초나라의 의제가 왜 항우를 제부(齊斧, 처형하는 도끼)로 미리 제거하지 못하였는가를 따지는 부분에서 김종직은 다시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져 붓을 멈추었다.
"전하, 늑대와 같은 수양대군이 멋대로 조정의 기둥인 김종서와 황보인 정승을 죽였을 때 죄를 물었어야 했사옵니다.”
김종직은 눈물을 닦고, 다시 붓을 들었다.
‘배신한 자에게 끝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시니
하늘의 운은 기어코 틀어지고 말았네.
한스러워라 이 세상 언제나 끝이 나서
구천을 떠도는 왕의 영혼 쉬어보려나.
나의 충성된 마음 뜨거워 쇠와 돌을 뚫으니
홀연히 왕께서 내 꿈속에 들어오셨네.
자양(紫陽)의 노련한 필법(筆法)을 따라
이제 제문 짓고 술잔 부어 제사 올리니,
바라건대 영령이시여 부디 와서 흠향하소서.’
자양은 김종직이 받드는 주자의 별호로, ‘자양 필법'은 공자의 춘추필법과 같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을 역사에 분명히 기록하여 사람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방식이었다.
김종직은 자양의 필법을 따른다는 말로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인 것을 글로써 나무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본분인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역사에 밝힌다는 뜻을 암시하였다.
김종직은 방약무인한 항우를 말하면서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이 된 수양대군을 나무랐고, 가련하고 힘없는 의제(義帝)를 말하면서, 성균관 유생 시절에 종로거리에서 뵈었던 단종을 생각했다. 김종직은 어린 왕의 넋이 시신이 버려진 영월의 강을 떠돌고 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김종직은 붓을 놓고 강원도 영월 쪽으로 꿇어앉아 엄숙하게 제문을 읽고 절을 올렸다. 비록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제문을 올려 구천을 떠도는 어린 왕에게 애통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렸다.
김종직은 제사를 지낸 후 밖으로 제문을 들고 나와 부싯돌을 켜서 태우려고 하였으나 차가운 밤바람에 종이에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꺾어 방의 등잔불에 불을 붙여서 제문을 태워 하늘에 날리려고 방에 들어왔다가 문득 다른 생각을 하였다.
‘이 글은 선왕(先王)에 대한 절의의 표식이니, 태우기가 아쉽구나!’
김종직은 불의(不義)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김종직은 나뭇가지를 문밖으로 던져버렸다.
제문을 다시 펴서 위쪽 여백에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위한 제문이란 뜻으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고 썼다. 김종직은 제문을 봇짐 깊숙이 간수했다.
김종직은 이날 밤 없애버리지 않은 제문으로 인해 훗날 자신은 물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참혹하게 목 베임을 당하게 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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