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분노했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 정해지고야 마는 것인가"
유자광은 나이에 비해 몸집이 크고 힘도 세어 동네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공부도 또래 아이들보다 뛰어나, 서당에서 초하루와 보름에 한 번씩 치르는 시험에서 자주 장원을 하였다. 유자광은 훈장 선생에게 칭찬을 듣고, 형처럼 자신도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날 치른 시험에서도 장원을 한 유자광이 어깨를 으쓱이며 서당에서 나오는데 한 학동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너는 얼자(孼子)라서 공부해도 소용이 없대!”
얼자는 양반 아버지와 천민 신분의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다. 서자(庶子)는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인 양인(良人)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는데, 서자와 얼자를 합해서 서얼(庶孼)이라고 했다. 서얼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 신분상의 제약이 많았다.
유자광은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얼자라니?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니?”
"훈장 선생님과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어.”
"무슨 말이야? 제대로 이야기해봐!”
유자광의 무섭게 덤벼드는 기세에 학동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너는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에 능하다 해도 과거를 불 수 없다고 했어.”
유자광이 학동을 밀쳐 넘어뜨리고, 씩씩대며 서당에 달려갔다.
유자광이 숨찬 목소리로 물으니 훈장은 당황하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하여라.”
유자광은 훈장이 자세한 이야기 없이 돌아앉아 혀만 차는 것을 보고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한테 물었다. 최씨는 아들의 질문에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자광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에 들른 유규는 최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아들의 처지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규는 좌절할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유자광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방에 앉았다. 부자간에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자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과거를 볼 수조차 없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유규는 아들의 목소리에 울분과 좌절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유규는 목이 잠기는 것을 느끼며 말을 꺼냈다.
"그래, 국법(國法)으로 너는 과거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유규가 말한 국법은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庶孼) 차별법이었다.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인 서얼은 과거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었다.
유규는 아들이 방바닥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유규는 더 해줄 말도, 그냥 지켜볼 수도 없어 자광을 홀로 두고 방을 나왔다.
유자광은 실망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치미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남원은 지리산 자락이다. 유자광은 험한 산과 계곡을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대었다.
"과거를 보고 벼슬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단 말인가!”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 정해지고야 마는 것인가!”
유자광은 마음을 못 잡고, 자포자기를 하는 심정으로 도박판에도 쫓아다니고 동네 건달들과 밤늦도록 쏘다니다가 들어오곤 했다. 유자광의 어미는 인생의 목표를 잃고 하루하루를 허비해나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가슴을 태울 뿐이었다.
유규도 외직(外職)으로 남원을 떠나 있어, 아들이 좌절하여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안타깝게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유규는 탄식하며 홀로 물었다.
‘자광은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