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큰 스승이 되다 (4)

김종직은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쓰려트렸다고 했다

by 두류산

4장


김종직은 김숙자가 한양의 4부 학당 중 하나인 남학(南學)의 교수로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남학은 중학, 동학, 서학과 함께 한성부에 설치된 사학(四學)의 하나로, 지방의 향교와 같은 등급의 관학 교육기관이었다.

김숙자가 남학에서 퇴청하여 김종직을 불러 물었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인 시제(試題)이다. 주역에 관한 문제인데 너도 답을 해보겠느냐?”

"주역은 아직 자세히 이해하여 꿰뚫어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글을 짓기가 어렵습니다.”

김숙자는 아들이 일찍이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실망하여, 학문에 소홀해진 것을 보아온 터라 탄식했다.

"처음에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겼는데, 내 희망이 끊어졌구나.”

김종직은 아버지의 꾸짖어 나무라는 말씀에 땀이 등줄기를 적셨다.


1450년 세종 32년 2월 17일.

아버지가 퇴청하시자마자, 상복을 내어달라고 했다. 김종직은 아버지의 침울한 표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갔다.

‘병이 깊으시던 임금께서 기어이 세상을 떠나셨구나!’

아버지는 묵묵히 상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대궐 방향으로 네 번 절하면서 크게 소리 내어 우셨다. 종직은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곁으로 다가갔으나 말릴 수 없을 만큼 크게 서러워하셨다.

세종이 승하하자, 왕세자가 37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 그가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인 문종이었다. 문종도 병약하여 곧 세상을 떠나자, 12세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은 궁궐 내에 보호해 줄 어른이 없는 외로운 임금이었다.

모친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인 소헌왕후도 단종이 6세가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김종직은 궁궐 내에 의지할 곳이 없는 어린 임금을 생각하니 불안하고 마음이 쓰였다.


김종직은 하루빨리 과거에 합격하여 어린 왕을 보필하리라 마음먹었다. 김종직은 단종이 즉위한 해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였다. 소과인 생원진사시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하며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있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는 부(賦, 산문과 시의 중간 형태)와 시(詩)로 문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3년에 한차례 실시하였다. 각각 100명의 합격자를 뽑아 생원과 진사라는 명칭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김종직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를 준비하며 집현전 학사가 되는 날을 고대하였다.

김종직은 공자가 저술한 《예기(禮記)》를 읽으며 조선을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유교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大同社會)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군주가 덕치로 어진 정치를 베푸니, 도(道)가 행해져 현명한 사람이 등용되며, 노약자와 병자들이 부양을 받으며,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이 없는 세상,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김종직은 유학의 가르침대로 나라를 바르게 경영하는 경세(經世)와, 백성을 구제하는 제민(濟民)을 생각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

김종직은 자신이 정몽주의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계승한 적통(嫡統)으로서 책임감을 가졌다. 김종직은 항상 경전과 역사책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을 때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나는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 선생이 가르친 도학을 배운 사람이다. 마땅히 성인(聖人)의 말씀을 삶에 반영하여, 도학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온 민수는 진사시를 치른 김종직이 공부하는 자세가 뛰어난 데다, 경전을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깊음을 알고 가깝게 지냈다. 민수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나 종직을 찾아,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다.

성균관에서 주역을 강론하던 교수가 유생들을 앞에 두고 물었다.

“음과 양이 교감하여 하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유생들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교수가 태학생들의 실력을 대놓고 비웃었다.


민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종직이 주역에 정통한 것을 아는데, 왜 나서서 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 않는지 애가 탔다. 민수가 종직을 돌아보고 눈짓을 하니, 비로소 김종직이 나서서 답하였다.

"하늘과 인간의 도는 음과 양이 상호 변천하고 교감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늘이 도를 세우니 음과 양이라고 말하고 인간의 도를 세우니 어짊과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교수는 간명한 답변이지만 핵심을 꿰는 말을 하니 다소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주역은 인간의 도와 덕을 어떻게 해야 구현할 수가 있다고 가르치는가?”

김종직은 차분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질문에 답하였다.

"인간은 하늘과 교감하는 존재로서, 하늘의 명을 미루어 인간의 도를 밝힐 수 있습니다. 하늘의 명을 깨달아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덕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악함을 막고 선함을 드높이는 것이 군자의 역할입니다.”

김종직이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답변을 하니 교수는 당황하였다.

교수는 다른 어려운 질문을 하며 종직을 시험하였다. 김종직은 어부가 그물 벼리를 당겨 그물 전체를 끌어올리듯이 주역의 곳곳에서 관련된 글귀를 찾아내어 자신의 주장과 해석을 뒷받침하며 명쾌하게 답을 했다. 결국 성균관 교수가 더 이상 묻기를 그치고, 유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지를 보아하니, 문리(文理)가 트인 게야. 지금이라도 주상전하 앞에서 강론을 해도 되겠어.”


1453년 단종 1년 10월.

김종직은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무뢰배들과 함께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정승을 철퇴로 쓰러뜨렸다고 하고, 영의정 황보인 등 여러 대신을 궁궐로 불러 궁문 앞에서 살해하였다고 했다. 수양대군은 동생인 안평대군을 모반을 했다는 죄로 처단하고, 병권을 독차지하며 정권을 잡았다.

성균관과 사학은 물론, 선비들 몇 사람만 모이면 앞으로 시국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논하느라 도성 전체가 어수선했다.

두 달 후 12월, 김종직은 단종이 돌아가신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돌아오는 장엄한 행렬을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보았다. 어린 임금은 화려한 가마를 타고 있었고, 뒤를 따르는 대소 신료들은 조복을 입고 따랐다. 행렬은 거창하고 화려했으나 엄동설한의 날씨에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었다.

김종직은 부모를 모두 잃고 무서운 숙부인 수양대군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어린 왕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하루속히 과거에 급제하여 가까이서 힘껏 보필하겠습니다!”


수양대군이 세종 때의 원로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자, 한성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하게 변했다. 김숙자는 고향 근처인 경산 향교의 교수에 자원하여 자리를 옮겼고, 김종직도 어지러운 한양을 떠나 부친을 따라 경산으로 내려갔다.

이듬해 경산에서 김종직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단종의 왕위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인 한명회와 권람 등에게 살아있는 왕이 왕위를 물려주는 선위(禪位)를 강요받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고 했다.

김숙자는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왕으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에 곧바로 경산 향교의 교수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스승들인 길재와 정몽주가 보여준 절의를 본받아한 결정이었다.


김종직은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다.

"김종서 대감과 같은 나라의 기둥들을 역모를 꾸몄다는 구실로 제거하고, 불법으로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더니..... 기어이 야심을 드러내어 어린 조카의 왕위를 강탈했구나.”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선위를 강요하여 왕이 된 것은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과 흡사하였다. 도연명은 현령을 사직하고 낙향한 중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으로 ‘술주’ 시를 지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의 선비로 평가받았다.

도연명은 ‘술주’를 통해 중국 동진(東晋) 공제의 양위로 왕위에 오른 유유(劉裕)의 왕위 찬탈 사건을 은유적 기법으로 비난하였는데, 지금의 현실이 그 당시의 상황과 너무나도 같았다. 김종직은 숨이 막혔다.

‘유유가 양위를 받으면서 요임금이 아들이 아닌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같은 아름다운 일로 꾸몄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역적질이었다.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누가 뭐래도 왕위 찬탈이며 반역이 아닌가.’

김종직은 ‘도연명의 수주에 화답하는 시’(和述酒詩)를 지어 수양대군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은유적으로 힐난하며 울분을 토했다.


요순(堯舜)의 훈훈함을 높이 끌어내었건만

선위(禪位)를 받은 것은 끝내는 역적이었네.

사관은 문장을 교묘하게 꾸며서

신령한 사령(四靈)이 나타났다고 속였다네.

거짓으로 하늘의 명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세상은 이미 어지러운데 어찌할 것인가.


사령(四靈)은 용, 봉황, 거북, 기린으로, 유유는 선위를 받을 때 태평한 시대에 나타난다는 네 가지 신령한 동물이 나타났다고 조작하여 세상을 속였다. 김종직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과 그를 도운 한명회, 권람 등 측근들을 공자의 춘추필법처럼 매섭게 비판하였다.

이 시는 훗날 암시적으로 은유한 내용이 밝혀져,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화(禍)를 가져오게 하였다.


김종직은 숙부가 조카인 어린 왕을 쫓아내고 왕으로 즉위하였는데도, 선왕에 대한 의리도 없이 새로운 권력에 빌붙는 벼슬아치들에 극도로 실망하였다.

"나라에 도(道)가 없어 임금과 신하가 의리로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벼슬하여 녹(祿)을 먹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녹은 녹봉(祿俸)의 줄임말로, 녹은 쌀과 곡식을 뜻하고, 봉(俸)은 베와 비단을 뜻했다. 김종직은 인의(仁義)를 저버린 군주 아래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글을 읽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집현전 학사가 되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이 꺾이니, 김종직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음식을 입에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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