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큰 스승이 되다 (2)

김종직은 다 쓴 답안을 자신 있게 제출하며, 소년 급제를 기대하였다

by 두류산

2장


세종은 집현전에 영을 내려 경전에 밝고 스승이 될 만한 선비의 명단인 사유록(師儒錄)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집현전에서 김숙자를 제일 첫머리로 천거하자 사헌부는 과거급제 후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렸으므로 유생들의 스승이 될 수 없다고 탄핵하였다.

조강지처는 술 찌꺼기(糟)와 쌀겨(糠)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을 같이 해온 아내란 뜻으로, 가난할 때부터 어려움을 함께 겪은 본처를 일컬었다. 김숙자는 이 일로 벼슬을 내려놓았다.


김종직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전처인 한 씨를 내쫓은 것은 사기 혼인을 당한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들었다.

‘전처 한 씨는 선산에 사는 한 변의 딸이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의 처녀들을 뽑아간다는 소문이 있을 때, 한 변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딸이 명나라에 뽑혀가는 것을 면하려고 하루빨리 혼인하기를 간청하였다. 할아버지는 그의 뜻을 불쌍히 여겨 승낙하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한 변의 딸이 첩에게서 얻은 서녀(庶女)인데도 신분을 속여서 결혼한 것임을 알게 되어, 아들에게 강요하여 즉시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한 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할아버지로서 자손이 서얼 차별법으로 벼슬길이 끊기게 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혼인을 파기시켰다고 했다. 이후 아버지는 밀양 박씨와 새로 혼인을 하였는데, 이 분이 종직의 어머니였다.


김종직이 13세가 되던 해에 김숙자는 서용(敍用, 죄를 지어 파직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이 되어 경상도 고령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인근 지역의 선비들이 높은 학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자, 김숙자는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가르쳤다. 김종직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15세가 된 김종직은 과거시험을 대비하여 실시한 모의 과거에서 제자들과 형들을 제치고 장원을 하였다. 김숙자는 아들의 학문하는 자세와 두드러지게 성장하는 모습에 흡족하였다. 김종직의 나이에 이만한 학문적 성장을 보인 제자는 없었다.

제자들이 ‘종직은 과거에 나서면 최연소 급제를 하여, 최연소 집현전 학사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자, 김종직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집현전 학사가 되면 뭐가 좋은가요?”

"집현전 학사가 되면 좋은 것이라.....”

김숙자는 아들의 호기심 어린 눈을 보며 말했다.

"우선,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나라에서 녹봉을 지급하면서 휴가를 주어 조용한 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깊이 연구할 수도 있단다.”

김종직은 세상의 모든 책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눈이 커졌다.

"실로 좋은 점은, 임금과의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군주가 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여 성현의 말씀과 현명한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란다.”

경연은 ‘경전을 공부하는 자리’로, 임금이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신하들과 더불어 국정을 토의하고 협의하는 자리였다.

"소자는 집현전 학사가 되어 군주의 바른 뜻을 제대로 돕기 위해 경전과 역사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종직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사들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며, 그들을 동경하여 공부에 소홀함이 없었다.

김숙자는 스승에게서 신유학인 도학(道學)을 배웠다. 도학은 성리학 혹은 주자학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므로 유학적 가르침인 도(道)의 실천을 추구하였으므로 부른 이름이었다. 김숙자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올랐을 때, 조선의 문장과 학문을 성리학으로 주도할 수 있도록 대제학(大提學)이 되리라 소망했었다. 대제학은 대개 성균관의 장관인 대사성을 겸하고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나라의 학문과 문장의 경향을 주도하였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아쉬움을 다음 세대에서라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종직이 대제학이 되어 도학을 조선에 널리 보급할 수 있게 된다면 평생의 한이 풀리겠구나.’


1446년 세종 28년.

훗날 조선 사림의 사조(師祖, 스승의 스승)라 불리는 김종직이 16세가 되던 해였다. 김종직은 집현전 학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른 나이임에도 과거에 응시하였다.

김종직이 시험장에 들어가 과장(科場)에 앉은 유생들을 둘러보니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선비들이고 환갑이 넘어 보이는 노인 유생들도 보였다. 또래나 자신보다 어린 유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김종직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다른 유생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차분히 눈을 감고 과거 책문(策問)이 펼쳐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김종직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책문이 적힌 두루마기가 펼쳐진 것이었다.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은 군왕의 의무이다. 무슨 방도가 있는지, 마음을 다하여 답하여 보라.”

책문이 드러나자 주변에 앉은 유생들은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김종직이 보기에 나라의 상황은 문제가 많았다. 요순(堯舜) 정치를 본받아 백성을 교화하여 나라를 바르게 경영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지금의 현실은 이상적인 왕도정치와 거리가 있었다.

김종직은 책문에 답하고자 붓을 드니 가슴이 벅찼다. 잠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김종직은 답안의 첫머리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한강에서 실시한 수륙재(水陸齋)에 대한 지적부터 하였다.

수륙재는 불교식 행사로 전국의 주요 산이나 물의 여러 귀신에게 음식을 차려 주고 죽은 사람의 원혼을 위해 중들이 경을 읽으며 재를 지내는 의식이었다.

"경전에 ‘복을 구하기를 간사한 데 하지 말라’ 하였는데,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 수륙재를 실시하였고, 왕후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전국 산천의 계곡과 절에서 천지신명과 부처에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욱한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왕실도 부처에 의지하여 혼령을 위로하고 복을 구하고자 하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 않겠습니까. 왕실에서 먼저 부처와 신령에 의지하여 제사를 지내는 한 어떻게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으며, 어떻게 민생이 안정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김종직은 붓을 먹에 다시 찍은 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오늘날 풍속이 야박해지고, 절의를 닦지 않고, 지방의 수령들은 탐욕스럽게 백성들에게 마음껏 거두고, 억울한 옥사가 넘쳐 민생이 날로 어려워지는 폐단은 왕실에서 먼저 유교의 가르침을 어겼기 때문이며, 조정이 먼저 기강을 허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직은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면 군왕의 몸가짐과 수양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는 본래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걱정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임금이 먼저 마음을 보존하고 도를 구하고, 그 도를 실현하여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정치를 한다면, 어찌 어려움과 근심이 있겠습니까? 수양을 통해 마음을 살피면 지극히 번잡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하나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김종직은 책문에 대한 답의 마무리를 자신 있게 써 내려갔다.

"성상(聖上)께서는 마음 가운데 도덕적인 본성인 도심(道心)을 보존하고 기르며, 언로를 널리 여시어 직언(直言)을 받아들이시면 천리 밖의 탐욕스러운 지방수령들을 제어할 수 있고, 억울한 옥사도 줄어들 것이니, 자연히 민생이 안정될 것입니다.”

김종직은 책문에 대한 답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즉 천하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집안부터 단속하고, 개인의 수양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하였다.

김종직은 다 쓴 답안을 자신 있게 제출하며, 소년 급제를 기대하였다.


과거 시험관 중에 당대 최고의 문장이라는 김수온도 있었다. 김수온은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보아 문장의 기세가 충만하고 거침이 없었고, 임금이 때때로 책문을 내어 시험하면 늘 으뜸을 차지하였다.

김수온은 합격권으로 분류된 답안지를 읽어보다가 김종직의 답안도 읽게 되었다. 김수온은 김종직이 쓴 글을 읽고 감탄하며 합격을 시키려는 데, 다른 시험관들이 김종직의 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장은 비록 뛰어나나 시대를 보는 눈이 지나치게 비판적입니다.”

김수온은 결국 김종직을 불합격시켰지만 그가 쓴 답안은 계속 생각이 났다.

‘비록 낙방은 했어도 장차 조선의 문형(文衡)이 될 만한 글 솜씨다.’

문형은 대제학의 별칭이었다. 온 나라의 학문과 문장을 평가하는 저울(衡)이라는 뜻으로 대제학을 문형이라고 불렀다.


김수온은 아깝게 탈락하여 머릿속에 맴돌던 글을 쓴 자가 고작 16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김수온은 임금에게 과거의 합격자를 보고하면서 김종직에 대해서도 아뢰었다.

"김종직은 비록 합격은 이루지 못했으나, 어린 나이에 재주가 남다르게 뛰어나니, 장차 나라를 이끌 재목입니다.”

세종은 김종직을 귀하게 여겨, 고향인 밀양 근처 영산(靈山, 지금의 창녕지역) 향교의 훈도에 임명하여 유생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전념하게 했다. 세종은 김종직이 다음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김종직은 경상도로 내려가면서 한강 나루터와 멀지 않은 제천정(濟川亭)에 들렸다. 정자에 오르니 비 온 뒤의 수려한 경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여기서 잔치를 베푼다더니, 과연 경치가 대단하다!’

김종직은 한강을 내려다보며 낙방거사가 되어 서울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눈 속에 잠긴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바라볼 때는 쉬우나 그리려고 하면 어려운데

일찍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줄 알았으니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김종직은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과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사람이 자기가 쓴 답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을 시로서 표현했다. 김종직의 시는 한강을 내려다보는 제천정에 ‘차라리 모란을 그릴 것을(寧畵牧丹)’이라는 제목으로 걸렸다. 지은이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시는 금방 유명해졌다.

김수온이 제천정을 지나다 현판으로 걸린 작자미상의 이 시를 보았다. 담백하게 보이지만 세태를 신랄히 비판하는 시였다. 김수온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것은 분명 지난날 과거 답안에서 본 솜씨다.’

김수온은 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이 시는 눈 속에 핀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처럼 보기엔 쉽지만 실제로 그리기는 어렵듯이, 자신의 과거 답안은 현실을 제대로 드러낸 글이었다고 말한다. 시험관이 자신의 글이 비판적이라고 제대로 평가도 하지 않았다고 비웃으며 입술에 바르는 연지로 모란이나 그려내면 만족하여 쉽게 합격시킬 것이라며 냉소하는 글이다.’

김수온은 제천정 아래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탄식했다.

‘이 사람의 재주는 정승판서도 될 수 있지만, 과거 답안에 임금과 조정을 향해 거침없이 비판하는 기질이라면 벼슬살이가 순탄하지는 않겠군.’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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