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체의 맥을 짚어 물 흐르듯이 강의하였다
1462년 세조 8년 5월.
세조는 경회루에서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 등 종친과 한명회, 신숙주 등 대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세조는 조회와 연회를 할 때 병서(兵書)와 경전, 역사서를 강의하게 하고, 참석자들과 같이 듣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이 날도 세조는 김종직을 불러 연회장에서 《중용(中庸)》을 강의하게 하였다. 성리학의 철학이 《중용》에 근거하고 있기에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배웠던 터라 쉽게 설명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 두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입니다. 도덕적 본성이 자신의 주체가 되도록 하고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도덕적 본성의 명(命)을 듣게 하는 것이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길이 되겠습니다.”
종친들과 대신들은 중용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전체의 맥락에서 설명하는 젊은 관리의 학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조도 김종직의 중용 강의에 만족하여 술을 내리며 칭찬하였다.
참석한 종친과 대신들이 오늘의 연회가 강의와 더불어 매우 좋았다는 찬사에 세조는 기분이 좋아 김종직에게 명했다.
"내일 이곳에서 오늘 참석자 그대로 한 번 더 연회를 열려고 한다. 내일은 《서경》을 강의하도록 하라.”
다음날 김종직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체의 맥을 짚어 물 흐르듯이 《서경》을 강의하였다.
사서삼경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와 《시경》, 《서경》, 《주역》의 삼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오경(五經)을 일컬을 때는 삼경(三經)에 《예기(禮記)》와《춘추(春秋)》를 포함한다.
김종직의 《서경》 강의에 종친과 대신들이 모두 칭찬을 보내자 세조는 기뻐하며 이조에 명했다.
"김종직의 품계를 한 등급 올려주어라!”
김종직은 자신의 학문을 높이 평가받아 연달아 승진을 하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김종직은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불의한 자들에게서 찬사를 받는데, 어찌 마음이 즐거운가?’
김종직은 자신에게 변명하였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하고, 쓴 약을 넘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배운 학문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궁중의 연회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내자시(內資寺)의 관리 김해(金侅)는 이번 연회를 치르면서 김종직이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을 보고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손자들의 스승을 이제야 찾았다!”
김해는 손자 둘을 데리고 김종직의 집을 찾았다.
김종직은 가르치는 것을 즐겨하여 김심(金諶)과 김흔(金訢) 형제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김심은 수염이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고, 큼직한 귀에 맑은 눈매를 가진 스승에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습니까?”
김종직은 제자를 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먼저 《소학(小學)》으로 시작하여 물 뿌리고 마당을 쓸고, 예절에 맞게 사람을 대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일을 실천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다른 책을 배울 수 있다.”
《소학》은 주자(朱子)와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유자징이 아동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으로, 어떻게 성인(聖人)이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수양론이다.
김심 형제는 《소학》을 읽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서로 돌아보았다.
김종직은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글 등을 모아놓은 유학(儒學)의 입문서인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의당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처럼 마음이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성현의 인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종직은 《소학》을 성리학 공부의 기본으로 여겨,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뜻을 익힌 후에 다음 책을 순서대로 체계를 세워 배우게 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나이에 관계없이 《소학》을 제대로 다시 읽게 하는 것은 아버지인 김숙자에게서 물려받은 공부 방법보다 훨씬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대사헌 김종순은 김종직의 학문과 문장에 관한 명성이 조정에 가득하자, 사헌부 집의 신말주와 지평 박숭질에게 말했다
"본부의 감찰 자리가 비었는데, 김종직을 데려옵시다.”
박숭질이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김종직은 스승의 아들로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말하면 오려고 할 것입니다.”
신말주는 박숭질의 말에 기뻐하며 말했다.
"이조와 사간원에서도 김종직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서둘러 주시오.”
신말주는 신숙주의 막내 동생이었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처가인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歸來亭)’을 지어 도연명처럼 자연을 즐겼다. 형인 신숙주가 동생을 벼슬에 나오게 강권하자, 결국 복직하였다.
김종직은 박숭질의 제안으로 정 6품 사헌부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 사헌부에 처음으로 등청하니 신말주가 따로 불러 김종직을 격려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행을 규찰하여 백성들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풀어 주며, 옳다고 생각되면 주상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언제나 곧은 말로 극진히 간(諫)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곳이네.”
김종직은 임금이 그릇된 판단을 하면, 뜻을 거스르더라도 사헌부가 제대로 고치는데 힘쓴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어떻게 임금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았는지 그 활약이 궁금하여 세세히 묻고 싶었으나 차차 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김종직은 사헌부에 들어간 그날 밤, 밀양에 계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올렸다.
"어머니, 사헌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헌부에 아버님의 제자로 형님과 함께 동방 급제한 박숭질이 있어 든든합니다. 사헌부가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감찰하는 일을 하니, 어사가 되어 혹 고향 가까운 곳에 가게 되면 어머니를 뵙고 큰 절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정 6품이 되었으니 고향 근처의 수령 자리가 비면 자원하여 어머니 곁으로 내려가서 효도를 다하겠습니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