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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ul 20. 2023

아기새가 새장을 벗어날 때

그림 소설

[목차: 꿈속에서]

♬ 꿈속의 로드킬

♬ 아기새가 새장을 벗어날 때

♬ 얼굴이 없는

♬ 끝내는 희미해져 끝에 가까워지는 것

♬ 길에서 온 고양이

♬ 해롭지 않다는 건


[소개글] 
- '꿈속에서'는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이 꼭지글에서 여자는 젊은 시절 무모한 면이 있었지만, 이제 녹록지 않은 현실을 안다. 그녀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규정하기 어려운 감정처럼 내용 없는 사건을 감당한다.





♬ 아기새가 새장을 벗어날 때


스무 살 때쯤 여자는 모든 가능성을 섣불리 믿었다. 그중에서 가장 섣불렀던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기새가 새장을 벗어날 때는 모든 것이 설렜고 새장에서 보인 하늘은 무한해 보였다. 거기에 도사리는 위험을 미처 몰랐다. 자신이 가장 초라하게 느껴질 때는 지극히 기초적인 것조차 해결하지 못해서 남들의 도움을 구해야 할 때였다. 이를테면 배고픈 것, 매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것, 






끝내는 부모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했다. 남자와는 점점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은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곧 의심이 더 커졌다. 대체로 그런 주기가 반복되면 점점 의구심만 짙어졌다. 부정적인 마음은 불처럼 타올라, 완벽한 선택으로 믿었던 순간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하고 있었다.


“사망의 골짜기를 끝없이 걷다 보면 기진맥진해지고, 야전에서 바라본 모든 곳이 어두웠다. 그 광막한 어둠이 어디서 끝날지 영영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 대한 피곤한 걱정이 서로를 격려하는 힘보다 강하고 끈질겼다. 카드 연체로 결국 카드는 쓸모없게 되었고, 아기새는 새장을 벗어나자마자 얼마 안 있어 폭포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생전 처음인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어서 물줄기의 힘을 미처 모른 채 폭포를 통과해 버리려던 죄였다. 경계를 건너는 일은 늘 위험을 동반하고, 변명하기 전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왕비는 사라지고, 과욕의 폭포수가 비명을 담아, 깨진 유리처럼 발 밑으로 흐른다.”






대한민국에선 걸어서 국경을 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금지된 선을 넘는 것, 그것은 생존을 건 도박이었다. 죽고 난 후에 실패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은 무의미했지만, 그러한 후회 섞인 기억의 복기는 본능에 가까웠다. 그 선택 말고는 정말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 생각하다가 잠들던 때가 있었다.


무엇으로 대체해도 될 것 같은, 형체만 윤곽으로 남은 그림자였다. 그것은 누구의 얼굴인지도 모른 채 입체적으로 일어나서는 여자에게 다가섰다. 그것이 기뻐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그것을 대하는 여자 역시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미묘한 감정은 동시에 있으면서, 어쩌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던 것 같은데, 규정할 수 없는 감정처럼 내용 없는 사건을, 대상 모를 대상에게 토로하고자 하였는데, 서로는 서로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한 채, 그림자는 기포로 부글대는 검은 물속으로 빨려 들었다. 변기 속 물이 검은 구멍으로 깊이 빨려 들어 사라지듯이, 발 딛지 못한 허공으로 쑥 빠질 때의 아찔함을 느끼게 하더니, 영영 사라져 버렸다. 허전했다.


그런 건 아무런 감정이나 사건으로 아무렇게나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꿈 같았다.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 나이대의 여자는 그랬다. 눈물을 흘렸는데, 그 아픔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몰랐고, 누구를 향한 서운함인지 누구를 향한 부끄러움이고 누구를 향한 안타까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을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은 있을까? 그래, 후회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꿈에서도 그런 것 하나쯤은 말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순간이 부득이 다시 생긴다면, 또다시 견뎌야 했다. 다시는 그런 견딤의 순간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체중이 늘었고 여인숙에 머무는 게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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